몇 해 전 세 번째 직장에 다니던 때였다. 변화와 성장에 목말라 있었지만 어떤 경력직 공고를 보아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업계, 비슷비슷한 직무로의 이직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다짐만 있을 뿐 달리 떠올릴 수 있는 선택지도 없었다. 당장 하루치 선택들에 매몰되어 시간만 가고 답은 보이지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를 보다가 문득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던가.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 속에서 불현듯 큰 결단이 끼쳐오기도 한다. 그 새벽의 퇴사 결심이 내게는 그러했다. 출근하자마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느냐’ 물어왔지만 멋쩍게 웃어넘겼다. 대책은 없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 해를 넘기도록 한 방울씩 차오르던 물이 그날 넘쳐흐른 것에 가까웠다.
백수가 되자 두려웠지만 생각과는 달리 해방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늘 대책이 있는 삶만 살아왔다. 이 줄을 잡은 채 저 줄을 잡아 왔다. 행여 놓칠까 노심초사했던 줄을 자발적으로 놓아버리자 강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손에 쥔 것이 없으니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뭣보다 당장의 출근에서 삶으로 고민의 추가 옮겨가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넓어진 기분이었다. 하루 최소 8시간, 몸뿐 아니라 마음도 종속돼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헬스장에 갔고 부지런히 달렸다. 삶 전체를 조망하자 매번 출퇴근길 나를 괴롭혔던 갈증이 구체화됐다. 일면식도 없던 다양한 이들로부터 조언을 구했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해 늦다면 늦은 나이 새로운 업계에 입문했다.
고작 반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이후 몇 가지 불가역적인 감각이 남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스스로 시간을 부여할 수 있다는 주체적 감각, 어떤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길을 찾아갈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출근을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 하게 했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감각이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살게 하는 것처럼. 회사 바깥의 시야라는 ‘제3의 눈’이 생긴 것 같았다. 곧 죽을 것처럼 괴롭던 일도 사람도 그 눈으로 거리를 두고 보면 새삼 별것 아닌 것이 되었다.
대책 없는 퇴사를 종용하고 싶진 않지만 생각한다. 가끔은 대책이 없어도 되는 것 아닌가. 아니,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은 채 얻을 수 있는 것이란 극히 제한적이므로. 그렇게 내놓은 답안은 대개 관성적이라 안전하고 무난한 것들 일색이므로. 손에 쥔 것이 없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앞서의 점들이 이루는 궤적을 끊어냈을 때 마침내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이 있다.
만일 그해 어떤 조직으로도 옮겨가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건 아마 그런대로 괜찮았을 것이다. 어떤 결정을 하건 인생에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고, 분명 또 새로운 길을 찾았을 테니까. 어쩌면 그게 지금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도전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나, 가장 쉬운 것은 안주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때로는 도망이 도전일 때가 있다. 무대책의 용기가 대책일 때가 있다. 어쩌면 그러한 단절과 변주가 뻔한 인생의 극적 재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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