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 간 무기거래 ‘금지선’ 묻자 뜻밖의 답변
“러와 협력할 건 협력, 원만하게 관리하겠다”
칼날 같은 직설 대신 ‘에둘러 말하기’로 변화
섬세한 대외전략으로 중-러와 갈등 관리해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은 즉답 없는 에두르기나 엉뚱한 동문서답으로 채워진 맥 빠진 회견이었다. 그 이유는 기자들의 후속 추가 질문이 사실상 막혔기 때문이다.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진행요원은 마이크를 가져가 버린다. 마이크도 없이 “그걸 물은 게 아니고…”라고 했다간 도어스테핑 중단 같은 사태를 부를 ‘제2의 슬리퍼 기자’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하긴 1년 9개월 만의 회견이니 물을 건 많았고 시간은 짧았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대통령실의 배려로 외교안보 분야에서 독점적 질문권을 누린 외신 기자들은 최대 현안인 북한-러시아 간 무기 거래를 두고 이어달리기 식 추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먼저 AFP 기자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북한 무기 사용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 데 대한 한국의 대응, 나아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할 조건이 뭔지를 물었다.
그간 북-러 무기 거래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혀 온 윤 대통령이다. 그런 만큼 미군의 빈 탄약고를 채워주는 식의 우회 지원을 넘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직접 지원하는 방안 같은 단호한 대응 의지를 밝힐 가능성에 외신은 주목했다. 한데 뜻밖에도 윤 대통령 답변의 핵심은 “공격용 살상무기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방침”이었다. 더욱이 작년 키이우 방문 때 약속한 안보·인도·재건 3대 지원에서 ‘안보’는 뺀 채 “인도, 재건 지원”만 언급했다.
BBC 기자의 추가 질문은 더 뾰족했다. 최근 주한 러시아대사의 “비우호국 중 한국이 가장 우호적”이란 발언까지 인용하며 한국이 용인할 수 없는 레드라인(금지선)이 뭔지 물었다. 그에 대한 답변도 의외였다. 윤 대통령은 “러시아와는 사안별로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반대할 것은 하면서 관계를 원만하게 잘 관리하겠다”고 했다. 이를 두고 BBC 기자는 회견 뒤 후기 영상에서 “그 답변이 놀라웠고 시사하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윤 대통령의 말이 최근 신중해졌다. 간간이 거친 말이 튀어나오긴 하지만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 같은 이념적 대결적 언사는 거의 사라졌다. 특히나 외교 분야에서 똑 부러진 직설어법이 줄어든 것은 꽤나 낯설게 느껴진다. 4·10총선 참패의 영향이 크겠지만, 그 계기로 늦게나마 지난 2년의 대외정책을 돌아보며 얻은 깨침의 결과라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래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관계 복원을 넘어 주요 7개국(G7),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까지 서방 진영을 향한 외교에 집중했다. 북핵의 고도화, 미중 간 대결 격화, 러시아의 침략전쟁 같은 신냉전 기류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지만 그런 서방 밀착 행보는 우리 외교의 좌표를 급격하게 이동시켰다. 적지 않은 마찰음도 들려왔지만 그럴수록 정부는 강하게 중-러의 반발을 받아치곤 했다.
그 결과는 중국·러시아와의 거리 두기를 넘어선 긴장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북-러 간 ‘위험한 거래’는 유엔 대북제재 전문가패널의 임기 연장에 대한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이어졌다. 북한이 제재를 비웃으며 핵능력을 고도화하는데 최소한의 감시 수단마저 잃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우리 교민을 간첩죄로 구금하는 ‘더러운 게임’까지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윤 대통령의 동문서답은 적어도 정부가 대러 관계에서 관리 외교에 들어갔다는 뜻으로 읽힌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한-러가 ‘우려의 균형’을 통해 서로 레버리지를 가진 형국”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북한에 군사기술 이전을,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자제하면서 레드라인을 지키자는 공감대를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중국과의 관계다. 지난해 윤 대통령의 대만 관련 직설(直說)과 주한 중국대사의 무례한 언동(言動) 이래 고위급 대화가 끊긴 한중 관계는 여전히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이 지난주 베이징을 다녀왔지만 “전반적으로 서로 다름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협력하기로 한 것이 가장 중요한 합의사항이자 성과다”라고 하니 별 소득은 없는 듯하다. 내주 윤 대통령이 주재하는 한중일 정상회의를 주목하는 이유다.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은 우리로선 가장 경계해야 할 구도다. 북한이 먼저 그 대결에 재빨리 편승했다곤 하나 우리까지 그 최전선에 나설 일은 아니다. 갈수록 커지는 북핵 위협에다 연말 미국 대선의 예측불가 변수까지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의 절제된 언어 못지않게 우리의 대외전략도 더욱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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