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료는 1977년 국민건강보험 도입 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빠르게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의료의 질과 접근성, 가격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에 있는 진료과목과 지역 간 불균형 및 격차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붕괴를 심화시켜 왔다. 실손보험 기반으로 과잉 팽창한 비급여 시장에 의한 ‘의료 상업화’ 문제, 대형병원 환자 쏠림 등 ‘서울 의료 공화국’ 문제도 함께 커졌다.
위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위기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랐다. 더구나 매우 빠르게 다가오는 초고령사회에서 폭증할 의료 수요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도 찾아야 한다.
정부와 의료계가 문제를 몰랐던 건 아니다. 어렵고 힘든 진료를 충분히 보상할 수 있는 건강보험 체계 재설계, 환자의 상태에 따라 동네의원부터 대학병원까지 나눠 맡는 이용체계 재정립, 합리적 의료사고 처리 시스템 구축, 충분한 의사 인력 확충 등 근본 개혁에 대한 논의는 20년 넘게 지속돼 왔다.
그러나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풀 근본 개혁 논의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 대신 부분적 수가 인상 등 미봉책으로 본질을 외면해 왔던 게 사실이다. 정부가 오랫동안 미뤄진 의료개혁을 할 마지막 기회로 인식하고 의대 증원을 포함한 개혁 청사진을 마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발표된 필수의료 혁신전략, 올 2월 발표된 의료개혁 4대 과제 등이 그 내용이다.
의료계는 의대 정원, 비급여 관리 등 일부 개혁과제에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공정 보상, 전달체계 정상화 등의 개혁과제에 대해선 공감하는 걸로 알고 있다. 최근 서울대 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공모한 ‘국민이 바라는 의료개혁’ 내용도 의료개혁 4대 과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큰 틀의 정책 방향 못지않게 중요한 게 구체적인 내용이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정부의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개혁의 구체성을 완성하고 합의를 이끌 논의의 장이 지난달 발족한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다.
특위는 통상적 정부 위원회와 달리 의료공급자가 민간위원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충실히 담기 위해서다. 또 범정부적 역량을 결집할 수 있도록 보건복지부 외에 기획재정부, 교육부, 법무부, 행정안전부, 금융위원회 등 각 부처 장관이 참여하고 있다. 의학교육의 질 향상,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필수의료 및 지역의료 기반 강화, 실손보험 개선과 재정투자 등을 통해 종합적이고 실효성 있는 개혁 논의가 가능한 여건이 마련됐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의 집행정지 기각·각하로 의대 증원 관련 논란은 일단락됐다. 이제 특위를 통해 국민과 의료 현장을 위한 개혁안을 구체화하고 실행력을 담보할 수 있도록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할 ‘대화와 개혁의 시간’이다. 특위에서 소통과 협력을 하면서 국민과 의료계, 정부 사이의 신뢰가 ‘비 온 뒤 땅이 굳듯’ 더 단단해지길 바란다. 현재 특위와 산하 전문위에 많은 의료인이 참여하고 있으며 개혁의 동반자인 대한의사협회와 전공의 단체에도 참여의 문이 열려 있다. 특위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의료시스템 개혁을 통해 국민이 신뢰하는 의료, 자긍심 넘치는 의료 현장이 되도록 나아갈 것이다.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지지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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