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스민 담양 ‘최소한의 집’… 기후위기 시대 ‘푸른 지침서’[김대균의 건축의 미래]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22일 22시 26분


조경은 자연과 나의 상호 교감
소쇄원-식영정-명옥헌 등 원림… 숲-계곡 풍경과 관계맺기에 방점
별서는 자연에 존재 숨기는 건축… 자연-인간 새 관계 설정에 시사점

전남 담양의 환벽당 별서(別墅). 조선 명종 때(1540년대 추정) 김윤제가 후학 양성을 위해 지었다. 별서는 자연에 조용히 스며들어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건축이다. 김대균 건축가 제공
전남 담양의 환벽당 별서(別墅). 조선 명종 때(1540년대 추정) 김윤제가 후학 양성을 위해 지었다. 별서는 자연에 조용히 스며들어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건축이다. 김대균 건축가 제공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담양 원림-별서 건축의 조경

자연을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심리학자 스티븐과 레이철 캐플런은 저서 ‘자연의 경험’에서 자연을 보는 동안은 도시에 비해 애써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줄어들면서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는 시간이 짧아지고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고, 결과적으로 신경계가 이완되어 집중력과 주의력이 회복된다는 것을 밝혔다. 이 외에도 식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회복이 빨라지고, 나무가 많은 도시일수록 범죄율이 낮은 등 자연이 주는 긍정적 효과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있다.》




사회생물학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 교수는 개미나 인간과 같은 사회성 생물들은 오랜 시간 동안 유전자와 생존하기 좋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진화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 중 생존을 위해 생명에 가치를 두는 타고난 경향을 ‘생명사랑’(biophilia)이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이 자연에 끌리는 것은 몸에 새겨진 인간의 유전적 본능이다.

자연을 가까이하고픈 마음은 인간의 유전적 본능과 더불어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적인 문학과 예술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다. 그리스 신화에서 목축의 신 ‘판’이 다스리는 목자들의 땅인 ‘아르카디아’는 많은 서양 회화의 소재가 되었으며, 서양의 목가적 풍경의 근원이다. ‘아르카디아’는 실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반도 지역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고대 로마 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목자들의 이상향으로 묘사한 이후 유토피아의 상징이 되었다. 서양에서 잔디가 있는 마당이나 공원은 사실 ‘아르카디아’를 향한 로망의 표현이다. 동양의 ‘무릉도원’ 역시 자연 속 안빈낙도를 노래한 전원시의 시조인 도연명의 ‘도화원기’라는 이야기 속 장소다. 실제 중국 장자제(张家界)가 무릉도원이라고도 하지만 유토피아는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방점이 있다. 동양에서 자연은 우주이자 존재의 시작이고 무한이고 인간 회귀의 장소로, 자연을 닮고 싶은 마음은 수많은 산수화와 시의 소재가 되었다. 결국 조경은 자연에 대한 갈망과 이상향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시도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조경’은 ‘경(景)을 조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사전에서 ‘경’은 맑고 바른 방향과 취지를 가진 형식으로 정의한다. 조금 더 깊이 ‘경’에 대해서 알아보면 경은 ‘묘(妙)’와 ‘진(眞)’을 품고 있어야 ‘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좋은 자연이나 도자기, 그림, 음악 등을 보고 듣는 순간, 시공간을 넘어선 묘한 심미적 감정이 일어나면서 생명력을 느끼고 교감한다. 여기서 시공간의 묘한 심미적 감정이 ‘묘(妙)’이고, 느껴지는 생명력이 ‘진(眞)’이다. 내용을 정리하면 ‘경’은 묘한 심미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 맑고 바른 생명력이 느껴지는 형상을 의미한다. 바람과 산도, 빛과 그림자도, 소리와 침묵도 묘한 심미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면서 생명력이 느껴지기 때문에 ‘경’이다. 이렇게 보면 조경은 식재를 하고 정원을 만드는 것을 넘어, 집에 바람을 들이고 햇빛을 들이는 것도 된다.

담양의 조선시대 원림(園林) 소쇄원. 원림은 주변의 산과 숲, 계곡 등 풍경과 ‘관계 맺기’에 방점이 있는 조경이다. 김대균 건축가 제공
담양의 조선시대 원림(園林) 소쇄원. 원림은 주변의 산과 숲, 계곡 등 풍경과 ‘관계 맺기’에 방점이 있는 조경이다. 김대균 건축가 제공
몇 해 전 뙤약볕과 소나기가 수차례 번복하는 여름날에 담양을 여행한 적이 있다. 담양은 많은 조선 시대 ‘원림(園林)’들이 지금도 생명을 담아 빛나고 있으며, 영산강의 발원지가 있고 광주 무등산의 지세가 이어지는 아름다운 땅이면서 역설적으로 조선 시대 유배의 장소이다. 연못 ‘담’에 볕 ‘양’을 쓰는 ‘담양’은 이름 그대로 연못 위 초록으로 우거진 나무 그림자와 햇살을 담은 연못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담양은 조선 시대 대표 문학인 가사 문학의 선구자 면앙 ‘송순’의 면앙정을 비롯해 관가정, 식영정, 소쇄원, 명옥헌 등 많은 원림과 별서 건축들이 있다. 참고로 ‘정원’이 주택과 같은 제한적인 장소 안에서 ‘조성’에 방점이 있는 조경이라면, ‘원림’은 주변의 산과 숲, 계곡 등 풍경의 ‘관계 맺기’에 방점이 있는 조경이다. 원림에 있는 별서 건축은 자연에 조용히 스며들어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최소한의 생활건축으로, 자연에서 자신의 존재를 통해 풍경과 관계를 맺는 정자와는 개념적으로 다르다.

‘시로 마을을 만든 곳이 어디 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담양은 정말 위대한 마을이다. 풍경에서 시가 나오고 다시 시가 풍경이 되는 삶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문학과 철학이 조경과 건축이 되고, 이것이 다시 생활이 되는 담양의 원림과 별서들은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한 기후위기 시대에 미래 문명을 위한 위대한 지침서다.

조경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과 나의 마음 사이에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에 들어오면 시와 노래가 절로 나온다. 우리가 집에 살면서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집 화분 하나도 정성껏 보살피는 생명의 마음에서 시와 노래는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결국 조경은 내 주변의 생명을 맑고 바르게 돕는 행위를 통해 상호 교감하는 마음이다.

#담양#기후위기#푸른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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