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한(韓) 대감께서 저를 멀리하신다는 걸 제가 잘 알지요. 주량이 세시니 저희 집 단 술이 못마땅하실 테고, 재주 빼어나시니 보잘것없는 제 시가 우습겠지요. 한때는 나지막이 시 읊으며 달빛을 거닐고, 한가로이 술에 취해 꽃을 즐기기도 했었는데. 우리가 똑같이 가진 걱정 하나, 봄바람 속 어느덧 귀밑머리가 허옇게 세었다는 것. (近來韓閣老, 疏我我心知. 戶大嫌甜酒, 才高笑小詩. 靜吟乖月夜, 閑醉曠花時. 還有愁同處, 春風滿鬢絲.)
―‘오래 한유 대감을 못 뵈어 시 한 수를 긁적여 보내다(久不見韓侍郞, 戱題四韻寄之)’ 백거이
주량과 시재(詩才)를 비교하며 상대가 자신을 홀대한다고 투정하듯 불평하는 시인. 거침없이 쏟아내는 어투로 보아 둘 사이가 영 데면데면하지는 않은 듯하다. 한유(韓愈)가 백거이보다 네 살 많고 직급도 더 높았지만 둘은 지금 같은 조정에서 관직을 맡은 처지. 후배에게 이 정도쯤의 천연스러운 농담은 용인되었을 법하다. 둘 관계가 정말 소원했다면 후배가 이리 당돌하게 나오진 않았을 테니까. 그 옛날 달빛 아래 시도 읊고 술도 마시며 꽃을 감상하던 추억을 되살리며 시인은 은근히 선배를 유혹하고 있다. 속절없이 세월이 흐르고 ‘봄바람 속 어느덧 귀밑머리가 허옇게 세었다’는 공통의 근심을 함께 나누자는 뜻을 이 완곡한 초대장에 담고 싶었던 것이다.
한유와 백거이는 각각 당대 산문과 시의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한 문호. 그러나 시만은 그 기풍이 판이하게 달랐으니 한유가 기이하고 난해한 자구를 애용한 반면 백거이는 쉽고 통속적인 시어를 즐겨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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