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우라 야타로의 ‘안녕은 작은 목소리로’라는 책에는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는 사람’ 얘기가 나온다. 한 달에 한 번만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런 사이에는 기분 좋은 거리감이 존재하는데, 특별하지 않은 만남이어도 헤어질 땐 어김없이 ‘만나서 좋았다. 고마워.’ 이런 생각이 들기에 신기하고 따스하다고. 공감했다. 세상엔 이런 관계도 있다. 나에게도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책 한 권을 읽고 만나서 밤늦도록 책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종로에서 독서 모임으로 사람들을 만난 지 어느덧 일 년이 되었다.
독서 모임에서는 고전이나 인문서 같은 혼자라면 완독하지 못했을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 모임에 온 사람들은 내 생활 반경에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성별도 연령도 직업도 성향도 취향도 다 다르다. 책으로 꿰어보기 시작한 이야기는 서로를 향한 질문과 질문으로 이어져 부드럽고 따뜻한 담요 같은 대화가 된다. 오히려 너무 가깝거나 너무 먼 사람에게 할 수 없었던 진솔한 속마음을 나누고, 함부로 규정하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었던 정반대의 의견들도 경청하면서 헤아려 보려 애쓴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만나 무언가를 주고받는 순간을 목격할 때, 대화의 아름다움은 이런 것일까 생각한다.
이 만남이 가장 애틋해질 때는 헤어질 때. 누군가 “전철역까지 같이 가요” 제안한 걸 시작으로, 모임을 마치면 종로3가역까지 다 같이 걸어가는 것이 일종의 의식이 되었다. 우리는 나란히 밤을 걷는다. 마치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를 걸어 나온 사람들처럼, 무척 피곤하지만 한껏 고양되어 충만해진 마음으로 우리가 보낸 시간의 여운을 곱씹는다. 자정에 가까운 깊은 밤, 서로의 걸음을 맞춰 걸으며 불 꺼진 상점들과 조용한 골목길을 지나간다. 이윽고 전철역에 도착하고, 먼저 도착하는 전철을 타는 이들을 배웅하며 헤어진다. 한 달 뒤에 다시 만나자고. 손을 흔들며.
초봄, 버트런드 러셀의 책 ‘행복의 정복’을 읽고 헤어지던 밤이었다. 대화를 나누던 동안에 봄비가 내렸다가 그쳤다. 오래된 거리 군데군데 고인 빗물에 가로등이 비쳐 별무리처럼 빛났다. 한소끔 선선해진 바람에는 미미하게나마 봄기운이 스며 있었다. 내내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누다가 돌아가는 길, 우리는 못다 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며 걸었다. 평온한 봄밤이었다. 폭넓은 관심을 기울이고 충실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깨닫는 것, 이미 우리 곁에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행복이라면. “지금 행복하네요.” 내가 말했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지요.” 누군가 책 속 문장으로 답했고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얄팍하거나 치밀한 인간관계에 지쳤을 때 나는 이 사람들을, 이 순간들을 떠올린다.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는 사람들이 소중하다. 적당한 거리감 덕분에 존중과 이해가 배어 있는 이 관계에는 조용한 우정이 깃들어 있다. 언제까지 이런 만남이 지속될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만나서 좋았다. 만나서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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