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규인]야구를 바꿔 버린 AI, 세상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24일 23시 12분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야구는 투수 놀음 그중에서도 선발투수 놀음이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마지막 선발 맞대결을 다룬 영화(퍼펙트 게임)의 존재가 이를 방증한다. 1987년 5월 16일 열린 실제 경기에서 최동원(209개)과 선동열(232개) 모두 공을 200개 넘게 던졌다.

이제는 한 경기에서 공 100개를 던지는 투수도 찾아보기 힘들다. 23일까지 올해 한국프로야구 경기에서 선발투수가 공을 100개 이상 던진 비율은 19.4%(494번 중 96번)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기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는 11.5%(1490번 중 171번)로 더 낮다. 2010년만 해도 MLB 선발투수 절반 정도(49.7%)는 공을 100개 이상 던지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선발투수가 과거에 비해 공을 적게 던지게 된 건 ‘빅데이터’ 때문이다. 미국의 데이터 과학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2017년에 펴낸 책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 “야구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한 포괄적 데이터 세트를 보유한 최초의 분야였으며 일단(一團)의 똑똑한 사람들이 데이터를 이해하는 데 기꺼이 일생을 바쳤다”고 썼다. 그리고 이 똑똑한 사람들이 만든 인공지능(AI)은 ‘선발투수에게 마운드를 오래 맡기는 건 효율이 떨어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AI는 또 야구를 ‘던지고 치고 달리는 종목’에서 ‘던지고 치는 종목’으로 바꿔놓았다. 데이터 분석 결과 도루나 ‘한 베이스 더 가는’ 주루 플레이가 기대만큼 효과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홈런, 삼진, 볼넷처럼 투수와 타자 사이에서 승부가 끝나는 플레이가 늘었다.

AI가 야구를 이렇게 ‘더욱 매끄럽게’ 만들자 ‘야구가 재미없어졌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관중 수도 TV 시청률도 줄었다. 이에 MLB 사무국은 투구 제한 시간을 도입하고 베이스 크기를 키우면서 야구를 다시 ‘먼지가 날리는 종목’으로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 부상 같은 사정이 없다면 선발투수는 무조건 6이닝 이상 던지도록 강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다비도위츠의 책은 “이제는 거의 모든 분야가 그렇게 (야구처럼) 변하고 있다. 야구가 선두에 서고 다른 모든 분야가 그 뒤를 따랐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가 세상을 집어삼켰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생성형 AI ‘챗GPT’를 만든 샘 올트먼 오픈AI 설립자가 선수들 기록이 빼곡하게 적힌 ‘야구 카드’ 수집광이었다는 건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미라 무라티 오픈AI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사람처럼 보고 듣고 말하는 ‘챗GPT-4o’를 발표하면서 “사람들이 챗GPT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마찰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강조했다. 야구가 그랬던 것처럼 AI 역시 ‘매끄럽게, 더욱 매끄럽게, 그보다 더욱 매끄럽게’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AI도 다음 단계 때는 야구처럼 ‘먼지’를 추구하는 쪽으로 발전해 가지 않을까. 우리를 인간(人間)으로 만드는 건, 신호등이 들어간 이미지만 골라낼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과 사이에서 생기는 마찰과 함께 살아가는 힘이니까 말이다.

#야구#투수 놀음#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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