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고물가 뿔난 美소비자
3%대 상승률에도 체감 20∼40%대… 햄버거 세트 2만원 훌쩍 “외식 사치”
배달 끊고, 마트 가격 비교하며 구매… 비프 대신 치킨, 유기농 대신 싼 달걀
다우지수 4만 돌파, 美경제 뜨겁지만… 3년새 껑충 뛴 물가에 허리띠 졸라매
《“집 앞 마트에서 자주 먹던 목초 달걀 12개들이 값이 9.99달러(약 1만3600원)로 또 올랐어요. 달걀만큼은 건강에 좋은 브랜드를 먹고 싶었지만 포기했습니다.” 26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시 퀸즈 지역 대형마트 ‘트레이더조’에서 만난 마지 후왕 씨(43)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는 집 앞 슈퍼보다 가격이 저렴한 자체브랜드(PB) 상품이 많은 해당 마트를 찾아 20분 걸어왔다고 했다. 》
3년 전만 해도 그녀가 선호하던 달걀 브랜드 제품 가격은 7달러 안팎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0달러 가까이로 오르자 저렴한 마트로 바꿨다. 4.49달러(약 6100원)짜리 달걀을 장바구니에 넣은 그녀는 “수수료도 비싸고 배달 팁도 내야 하는 인스타카트(장보기 배달 서비스) 사용은 끊었고, 대형마트 ‘코스트코’와 ‘트레이더조’에서 가격을 비교해 번갈아 장을 본다”고 말했다.
메모리얼데이(한국의 현충일 격) 연휴를 앞둔 이날은 뉴욕 시민들이 한꺼번에 장거리 여행을 떠나 시내 곳곳이 한적했지만 마트 계산대 앞은 달랐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주차장도 없지만 개인용 카트를 끌고 먼 길을 걸어온 소비자들도 눈에 띄었다.
● 햄버거 세트 2만 원… 뿔난 美 소비자
미국 소비자들이 3년여 지속된 인플레이션에 지쳐 ‘짠물’ 소비로 속속 돌아서고 있다. 미국의 ‘나 홀로 성장’을 이끌어 온 소비자들은 여전히 경제지표에선 미 경제를 떠받치는 것으로 나오지만 현장 경기 중심으로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상 징후가 감지되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경기 진단을 반영하는 미시간 소비자심리지수는 이달 67.4로 5개월래 가장 낮았다.
2022년 9%대까지 치솟았던 미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이제 3%대로 내려왔지만 현장 소비자들은 3년 전과 비교해 물가가 20∼40% 뛰었다며 생계비 상승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먹을거리 물가는 서민들의 장바구니 사정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미국 농무부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2년 미국 가계 가처분 소득에서 식료품은 11.3%를 차지했는데 이는 199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외식 물가도 뛰고 있다. 26일 마트에서 만난 20대 남성은 “햄버거 가격이 너무 올라서 패스트푸드 콤보(세트) 메뉴가 15달러(약 2만400원)가 넘는다”며 “차라리 만들어 먹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맥도널드나 버거킹과 같은 대형 외식 업체도 지역별 가격이 다른데, 뉴욕에선 맥도널드 빅맥 세트가 세금 포함 약 13달러, 쿼터파운드 버거 세트는 15달러가 넘는다. 지난해 코네티컷주에서 18달러짜리 맥도널드 세트 메뉴 사진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되며 ‘패스트푸드가 럭셔리가 됐다’는 공분을 샀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달 패스트푸드 가격은 전년 대비 4.8% 뛰었고, 10년 전과 비교하면 약 47% 뛴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으로 치면 대표적 서민음식 짜장면이나 국밥 값이 치솟은 셈이다.
● 50센트라도… 허리띠 조인다
먹거리 가격이 치솟자 미 소비자들은 조금이라도 싸게 사기 위한 묘안을 짜내고 있다. 미국인들이 주로 먹는 시리얼, 계란, 우유, 베이컨 할인 쿠폰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도 생겼다.
비싼 소고기 대신 가격이 저렴한 닭고기를 먹는 트렌드도 생겨났다. 시장조사기관 서카나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기준 1년 동안 미국 닭고기 판매량은 3% 증가한 반면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하락 추세로 나타났다.
미국 최대 육류 공급업체 타이슨 푸드의 도니 킹 최고경영자(CEO)는 WSJ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소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제품을 고르고 있다. 소고기 소비자들이 닭고기로 옮겨간 점이 닭고기 강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명 식료품 브랜드보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PB를 찾는 추세도 도드라진다. 미국에서 ‘트레이더조’나 ‘알디’ ‘코스트코’ 인기가 치솟는 이유다. 40대 주부 후왕 씨도 기자에게 “조금이라도 싸면 20분 정도는 걷는다”고 설명했다.
저소득층이나 중산층이 주로 이용하는 월마트에도 싼 물건을 찾는 중상층 소비자들이 몰리면서 월마트는 최근 1분기(1∼3월) 시장 전망을 뛰어넘는 실적을 발표했다. 주가도 사상 최고 수준으로 급등했다. 월마트는 “연소득 10만 달러(약 1억4000만 달러) 이상 중상층 고객이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며 실적 호조 배경을 밝혔다.
미 소비자들의 ‘짠물’ 소비 패턴을 확인한 다른 유통업체나 맥도널드 등 외식업체는 최근 앞다퉈 ‘파격세일’ 미끼상품을 내놓고 가격 전쟁 시동을 걸고 있다. 이달 초 대형마트 타깃이 5000여 개 상품을 할인한다고 발표했고, 온라인 공룡 아마존의 식료품 부문 아마존 프레시도 뒤이어 4000개 가격 할인 품목을 발표했다. 가격 인상에 소비자들의 분노가 집중됐던 맥도널드는 5달러짜리 세트 메뉴를 다음 달 25일부터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 다우 4만 돌파에도 “어느 나라 얘기냐”
‘짠물’ 소비자들의 불만과 달리 미국 경제는 여전히 유럽이나 아시아에 비해 강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대표 30개 대기업 주가를 반영하는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최근 종가로도 4만 포인트를 돌파하는 이정표를 세웠다. 하지만 미국 서민들을 중심으로 “증시 랠리는 어느 나라 얘기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이달 영국 가디언과 미국 여론조사 회사 해리스폴의 공동조사에 따르면 미국 응답자 55%가 “미국은 경기 침체에 있다”고 답했다. 미국의 강력한 경제 성장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따르면 미 소득 상위 10%가 상장 주식 93%를, 상위 1%가 54%를 차지하고 있고, 이 비중은 늘어나는 추세다. 미 저소득층은 증시 랠리에서 소외됐을 뿐 아니라 금리 인상으로 치솟은 임차료에 타격을 입은 상태다.
연준이 최근 발표한 ‘2023년 가구 설문조사’에 따르면 임차인 19%는 최소 한 번 이상 임차료를 제때 내지 못해 밀렸다고 응답했다. 이는 2022년에 비해 2%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대선을 앞둔 미국 정치가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최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미국 경제가 어느 때보다 좋은데 많은 미국인들이 주변 분위기와 잘못된 정보 전달로 현 상황을 침체로 느끼고 있다’는 요지의 칼럼을 쓰자 분노의 댓글이 500개 이상 달렸다. 이들은 “생계비 걱정 없는 엘리트들은 평범한 미국인의 고통을 모른다”, “크루그먼은 매주 우윳값을 얼마 내는지 궁금하다. 나는 50센트 싼 우유를 찾아 1마일(약 1.6km) 먼 마트를 간다”고 비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