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적 도로정비 둘러싼 사기 사건
조선 황실의 인척인 민영린 백작… 총독부 하급관리에 ‘은밀한 제안’
“개발정보 알려주면 이익 나눌 것”… 관리 “일본인 실무자에 뇌물 줘야”
일본인 ‘배우’로 동원해 돈 빼돌려… 도시개발로 들썩인 당시 상황 반영
《 개발이익을 노린 부동산 투자자는 토목과 공무원을 접촉해 “개발 정보를 미리 알려주면 이익을 나눠주겠다”고 은밀한 제안을 한다. 공무원은 “실무자에게 뇌물을 줘야 정확한 정보를 빼낼 수 있다”며 사례금을 받아 가로챈다. 일확천금에 눈 먼 욕망들이 속고 속이는 사기극. 오늘 일어난 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현대적인’ 부동산 투자 사기 사건, 112년 전 경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1912년 11월 ‘매일신보’에는 한 사기 사건 기사가 실렸다. 사건의 발단을 보면 “경성 중부 농포동(현재 종로구 권농동 일대) 사는 전 조선총독부 속(屬·하급 관리의 일종) 설기하는 나이 지금 30세인데 명치 44년(1911년) 5월 총독부 속이 되는 동시에 토목과 근무가 되었는데 본년(1912년) 3월경에 구리개길 개축에 당해 그 길에 들어가는 가옥을 훼철(철거)케 하라는 임무를 받은 바 초전골(현재 중구 초동 부근) 등지에 있는 백작 민영린 씨 집이 그 길에 들어가는 고로 이것을 훼철하라고 독촉하기 위해 동대문 밖 민영린 씨 집에 가서 민 백작에게 가옥 훼철을 독촉할 때에…” 》
총독부 토목과의 하급 관리 설기하는 ‘구리개길’의 정비사업, 즉 시구개정 사업을 위해 도로 예정 부지에 들어간 가옥의 철거를 주인에게 통지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중 백작 민영린 소유의 가옥이 있었다. 구리개는 현재 을지로 1, 2가의 야트막한 고개를 부르는 이름이다. 황토로 된 땅이 햇볕을 받으면 마치 구리가 반짝거리는 것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동현(銅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처음에 본정통(현재 충무로 일대)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차츰 구리개로 ‘북상’하여 상점, 은행, 회사 등을 개설했다. 그리고 그곳을 ‘황금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황금정은 일본 도시의 흔한 지명 중 하나인데, 아마도 구리개라는 옛 지명과 연결지으면서 화려한 상업, 금융가의 의미를 담은 게 아닌가 짐작한다. 청계천 남쪽에 있어서 조선시대까지 주요 도로가 아니었던 황금정은 병합 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일본인 중심의 상업, 금융가로 개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구개정 사업에서도 최우선 순위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민 백작은 피고 설모에게 그 집은 이익을 볼 작정으로 매수했는데 다 도로에 편입되어 낭패가 적지 않은 즉 그대가 요행히 토목과에 있으니 이후 시구를 개정할 때에 예정선을 미리 알 터이니 그것을 좀 알려달라. 그러면 그 토지를 매수하여 이익을 분배할 터이라는 부탁을 받고 기회를 기다리다가 본년 5월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시구개정의 예정이 됨으로써 이 기회를 잃지 말라 하고 민 백작에게 통기하여 태평통 부근 토지를 매수하라고 권했으나 민백작은 매수 자본금을 변통치 못해 시기를 잃어버렸는데…”
민영린은 황금정 도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로변이 될 것이라는 가옥을 매입했다. 도로 정비를 완료하면 집값이 크게 오를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의 가옥은 도로 부지에 포함되어 버렸다. 오히려 큰 손해를 본 민영린은 설기하에게 다음 개발 정보를 알려주면 이익을 나눠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시구개정의 예정”을 알려주었으나, 민영린이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일단 계획은 무산되었다.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란 태평통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성문에서 궁궐까지 바로 도로가 연결되는 것을 꺼렸다. 따라서 태평통 시구개정은 상당한 부분 새롭게 도로를 뚫는 공사였고, 그만큼 도로변 토지나 가옥의 시세 변동이 클 것이 예상되었다. 민영린은 아까운 기회를 또 한 번 놓친 셈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민영린과 설기하 두 사람의 은밀하고 부적절한 거래, 개발 정보의 누설 문제일 뿐이다. 본격적인 사기 사건은 이제부터다.
“피고는 본년 8월에 민 백작을 방문하고 이왕 말하던 계획을 실행하느냐 안 하느냐 질문하니 민 백작은 돈을 변통치 못해 약조대로 실행치 못했노라고 하고 이후에나 계획을 해볼 터이니 이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기화로 알고 민 백작에게 금전을 편취할 계획으로 민 백작에게 말하기를 이 계획은 토목국 공무과 내지인 기수(技手)에게 어떻게 안 하면 형편이 좋지 못하다고 거짓말을 하여 돈 내기를 권함에 민 백작은 그러면 그 내지인에게 상당한 사례금을 주리라 하니 피고는 이왕부터 친히 알던 내지인 모에게 말하여 민 백작이 경영하는 종로 공다옥에서 사례금으로 150원을 편취한 일이…”(시구개정으로 사기취재(詐欺取財), ‘매일신보’ 1912년 11월 10일자).
설기하는 계속해서 개발이익을 놓치는 민영린의 다급한 심정을 이용한다.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면 일본인 실무자에게 뇌물을 주어야 한다고 하며 아는 일본인을 ‘배우’로 동원하여 사례금을 가로채는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다. 이 사건은 식민지 수도의 새로운 외관을 꾸미는 과정에서 욕망의 아사리판이 된 경성의 민낯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가해자 설기하와 피해자(?) 민영린은 어떤 사람일까?
설기하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병합 전 기록은 1908년 계몽운동단체 대한협회 회원 명부에 등장하는 정도이다. 이 사건으로 총독부에서 면직된 후에는 1914년 경성의 수산물 유통 사기범으로 한 번 더 신문에 등장한다. 나름 ‘계몽청년’으로 출발했지만, 시세에 순응한 끝에 점점 타락해간 인물로 짐작된다.
민영린 백작은 명성황후의 먼 인척인 민술호의 아들로 어렸을 때 훗날 순종의 장인이 되는 민태호의 양자로 입적했다. 법적으로 순종의 첫 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1904년 사망 후 추존)의 동생이다. 가문의 후광을 업고 대한제국기 다양한 관직을 거쳐 병합과 함께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일본 정부는 병합 당일 일본 황실령으로 ‘조선귀족령’을 공포하고 대한제국 황실의 인척, 정부 고관대작, 그리고 이른바 ‘합방 공로자’ 등 70여 명에게 후작에서 남작까지의 작위를 수여했다. 조선 귀족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화족(華族) 제도를 본뜬 것이다. 화족 제도는 메이지유신 이전 도쿠가와 막부의 고관이나 지방을 통치하던 다이묘(大名)들에게 작위를 수여하여 근대 천황제 국가의 지배층으로 포섭한 제도이다. 조선의 귀족 제도도 비슷한 취지라고 할 수 있다. 민영린은 황실의 인척이자 고관대작 출신으로서 상대적으로 높은 백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 귀족은 작위와 더불어 2만5000엔에서 많게는 50만 엔의 은사금(천황의 하사금)도 받았다. 일제는 이런 특혜를 주는 대가로 조선 귀족이 식민지민에게 ‘모범’을 보여 식민통치 안정화에 기여할 것을 요구했다. 병합 초기 ‘매일신보’에 ‘귀족의 책무’를 강조하는 사설이 자주 실린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 귀족은 일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많은 수가 사치, 축첩, 도박 등에 빠져 경제적, 도덕적으로 몰락했다. 거액의 은사금을 날리고 무일푼으로 전락한 경우도 허다했다. 그에 비하면 경성의 도시 개발 바람에 편승하여 분주하게 이익을 추구한 민영린은 영리한 편이었달까? 하지만 일본인 관리에게 뇌물까지 주려던 민영린의 ‘투자’는 실패로 끝난 셈이다.
그런데 민영린은 수년 뒤 다시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오랫동안 상습적으로 아편을 흡입한 것이 발각되어 1919년 징역 3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작위를 박탈당한 것이다. 이후에는 더 사정이 나빠진 듯하다. 사후(1932년 사망)의 한 잡지 기사를 보면 “민영린의 패가는 어찌 되었나? 부귀자제의 의례히 좋아하는 호색은 물론이고 호색 끝에 마약의 중독이 극도로 심하야 탈작(奪爵)까지 당하고 도박을 일삼다가 전답은 물론 위토선영까지 다 없애 버렸다”고 했다(‘별건곤’, 1933년 5월호.). 그도 종국에는 경제적, 도덕적으로 몰락한 조선 귀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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