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총선이 끝나고 세종시 관가에서는 일제히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3분의 1밖에 안 되는 여당 의석으로 어떻게 국정을 꾸려가야 하나.”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를 수습하듯,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들은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무기를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극단적 여소야대에 정권 ‘식물화’ 우려
여당은 이번에 300석 중 192석을 잃었다. 집권세력엔 사망선고일 것 같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행정부의 권력은 생각보다 막강하다. 우선 나라의 돈줄을 여전히 쥐고 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더 중요한 ‘증액 동의권’을 갖고 있다. 국회는 정부가 짜온 예산을 이래저래 삭감할 수는 있지만, 정부 동의 없이는 어떤 지출 항목도 규모를 늘리거나 새로 만들지 못한다. 두 번째 무기는 시행령. 정부 여당의 입법 기능은 이제 완전히 상실됐다고 볼 수 있으나, 대통령에게 위임된 권한으로 아직도 많은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종합부동산세 같은 세금 제도다. 법 개정으로 세율을 바꾸지 않고도 시행령을 통해 실제 국민들의 세 부담(과세표준)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마지막은 이 정권이 워낙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 필부에게도 익숙해진 재의요구권(거부권)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남은 3년을 버틸 통치수단이 대충 이 정도라는 점을 인식한 듯하다. 그가 얼마 전 국민의힘 초선 당선인들을 모아 놓고 “정부 여당으로서 권한이 있으니 소수라고 기죽지 말라”고 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선거 직후 관가에서는 “야권이 200석을 넘지 않은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는 자조가 나왔다. 그랬다면 모든 법안을 야당이 단독 처리할 수 있게 되고, 여권이 힘겹게 찾아낸 ‘3개의 화살’ 중 2개(거부권과 시행령)가 우습게 사라질 뻔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윤 정부의 경제 정책은 법을 바꾸지 않고도 구현할 수 있는 ‘잔잔바리’ 대책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의 창의성이 받쳐줄지 걱정되기는 하나, 이들은 이런 여소야대 상황에 아주 익숙하다.
문제는 이런 정치 판도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 역시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점이다. 관가에선 벌써부터 무력감을 넘어 복지부동과 책임 회피, 야당에 줄 대기 같은 풍토가 만연한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재정준칙 마련 등 주요 정책이 줄줄이 좌초되는 가운데, ‘해외 직구 금지’ 번복 사태는 가뜩이나 움츠러든 공직사회에 “뭐든 절대로 나서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우려는 야당은 거대 의석으로 정부의 발목을 잡고, 정부는 거부권으로 이에 응수하는 비토크라시 정국이 임기 끝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서로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늘어져 결국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는 심각한 국정 정체가 불가피하다. 삼권분립이 아닌 삼권대립, 삼권충돌의 시나리오다.
민생-실용주의 정부로 재탄생해야
새 국회가 오늘 개원한다. 여소야대 정부가 ‘식물화’되는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민생이 걸린 사안에 더욱 주도권을 갖고 임해야 한다. 거대 야당을 설득하고 국민 여론을 경청하며 과도한 이념 색채를 줄여 실사구시 정책을 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총선 이후 정부 여당이 그런 쇄신의 태도를 보여준 게 있었나. 오히려 연금개혁이나 종부세 개편 같은 현안은 야당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면서 대통령 심기 경호를 위해선 한 몸처럼 똘똘 뭉치는 작태만 보이고 있다. 22대 국회에서는 거부권이 무력화되는 이탈표의 기준도 17표에서 8표로 낮아진다. 까딱하다가 윤 정부 후반부는 정말 레임덕(lame duck)을 넘어 데드덕(dead duck·심각한 권력 공백)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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