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연찬회서 축하주 돌린 대통령
총선 참패 ‘반성과 쇄신’ 없이
‘용산-108 의원’ 똘똘 뭉친다고
힘도, 인기도 없는 與 신세 면할까
2010년 8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초청한 적이 있다. 오찬 테이블에서 전 전 대통령은 “와인 더 없느냐”고 했다가,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에 술 먹으러 왔나”라고 된통 면박을 당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술에 취해 격분하는 일이 잦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재임 중이던 1969년 4월 미 해군 정찰기가 북한을 정찰하다가 공격을 받고 격추됐다. 닉슨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전술핵 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미군에 내렸는데, 이때도 술에 취해 ‘분노지수’가 치솟은 상태였다. 다행히 ‘실세’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술 깰 때까지 기다리자”고 해서 한반도에 핵폭탄이 투하되는 비극이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전직 대통령쯤 되고 보면 술이 작게는 ‘개인적인 망신’에서, 크게는 ‘초대형 리스크’의 뿌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또 술과 관련한 구설에 올랐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국민의힘 당선인 워크숍 만찬에 참석해서 테이블을 돌며 맥주를 따랐다가 야당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얼차려 훈련병 영결식 날 술타령… 진정한 보수라면 이럴 수 있나?”는 글을 올렸고,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맥주 한 잔을 들이켜신 겁니다”라고 꼬집었다.
윤 대통령이 축하주를 돌린 날은 22대 국회가 임기를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108 대 192. 집권여당의 기록으로는 사상 유례가 없는 참패를 하는 바람에 거대 야당의 ‘재가’ 없이는 웬만한 법안 하나 들이밀 수 없는 게 지금 윤 대통령과 여당의 처지다. 국민에게 약속한 수많은 공약과 개혁 다짐의 무거움을 조금만 생각했다면 “오늘은 제가 욕 좀 먹겠습니다”를 외치며 호기롭게 맥주캔을 들어 올리지는 못 했을 터다.
4월 말 국민의힘 내부 토론회에서 이 당의 김종혁 조직부총장은 총선 참패 원인과 관련해서 “국가지도자인 대통령의 PI(President Identity·최고경영자 이미지)가 2년간 속된 말로 망했다. 대통령이 ‘격노한다’는 보도가 나가면 그걸 보는 국민이 행복하겠나. 격노해야 하는 사람이 대통령인가, 국민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다만 한마디 첨언을 하자면, 망가진 윤 대통령의 PI에서 부정적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격노’만 있는 게 아니다. 윤 대통령은 엑스포 개최지 결정을 눈앞에 둔 지난해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가 ‘폭탄주 회식’ 논란에 휩싸였다. 또 지난달 10일에는 서울의 한 전통시장을 방문해서 수산물 판매대에 놓인 멍게를 보고 “소주만 한 병 딱 있으면 되겠네”라고 말했다가, 야당으로부터 “민생은 술안주 쇼핑이 아니다”는 뼈 아픈 일침을 맞았다.
대통령실과 여당이 제정신이었다면 진즉에 대통령의 PI에서 ‘술’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관리에 들어갔어야 했고, 연찬회장 테이블 위의 맥주는 윤 대통령이 뭐라 하든 사전에 치워졌어야 정상이다.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의 지지율을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미국 ‘모닝 컨설트’의 홈페이지에는 5월 1∼7일 사이 조사된 24개국 국가지도자의 지지율이 올라와 있다. 꼴찌는 15%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다. 윤 대통령은 19%로 23위다.
‘그래도 기시다보단 낫네’ 이렇게 위안거리로 삼을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기시다 총리의 경우 비록 지지율은 낮지만,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합해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에서 모두 탄탄한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인기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정책을 입법으로 뒷받침할 힘은 있다.
이에 비해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인기도, 힘도 없는 ‘역대급 약체’ 집권 여당이다. 지지율 회복과 외연 확장, 협치가 절실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국민의힘 워크숍에서는 믿기 힘든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윤 대통령은 그간의 ‘오답 노트’에서 교훈을 찾고 또 찾아도 지지율 반등이 쉽지 않을 판에 “지나간 건 다 잊어버리자”고 외쳤고,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은 “우리가 소수정당이라고 하는데 사실 108이 굉장히 큰 숫자”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쇄신’과 ‘반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똘똘’과 ‘단결’ 구호만 난무했다.
차라리 술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기라도 한다. 그보다 더한 미몽(迷夢)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듯한 윤 대통령과 여당은 언제나 깨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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