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는 피해자 8명을 죽음까지 내몰고 조 단위의 보증사고로 이어진 역대 최악의 ‘부동산 실패’다. 피해자 1만7060명 중 73.7%가 20, 30대 청년들이다. 그 충격으로 서울 등 수도권에서 빌라 전세를 꺼리는 ‘빌라포비아’ 현상까지 나타나 서울 아파트 전셋값을 밀어 올리고 있다. 이 정도 대규모 후진국형 부동산 사고는 개인의 잘못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의 박상우 장관은 “전세를 얻는 젊은 분들이 덜렁덜렁 계약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 싶다”며 청년들에게 일부 책임을 돌렸다.
전세사기, 부동산PF 위기도 남 탓
덜렁덜렁 일한 건 국토부다. 전세사기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정보 불균형을 파고든 악랄한 조직 범죄다. 신축 빌라는 기준 가격이 없어 집주인과 거래를 주선하는 공인중개사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다가구주택의 경우 등기부등본을 떼어도 선순위 세입자가 누구인지도 나오지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시장 가격과 권리관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면 청년들이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사기를 피하기 어렵다. 당국이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빌라의 가격과 주택 권리관계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공인중개사의 일탈을 철저히 감시했어야 한다.
야당이 21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주택도시기금을 헐어 전세사기 피해자를 먼저 구제하고 나중에 변제를 받는 내용의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하려고 하자, 국토부는 본회의 전날에서야 전세사기 피해자 주거안정대책을 부랴부랴 내놓았다. 박 장관은 “일반 국민에게 악성 임대인의 채무를 전가하는 것”이라며 법안을 단독 처리한 야당을 비판했다. 그가 더 부지런히 피해자 구제 대책을 챙겼다면 뒤늦게 옥신각신할 일도 없다.
박 장관은 4·10총선을 앞두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설이 돌자 “위기 상황이 과장돼 묘사되고 있다”며 언론 탓을 했다. 국토부가 열심히 일했다면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부동산PF 부실이 이처럼 커졌을까. 그렇지 않으니 시장에서 위기설이 자꾸 나오는 것 아닌가.
박 장관의 인식과 달리 밖에서는 국토부를 탓한다. 금융당국 내부에는 “국토부가 건설사 구조조정에 소극적”이라는 불만이 있다. 출생 장려 성격이 퇴색된 신생아특례대출을 대거 풀어 전세사기로 가뜩이나 불안한 서울 전세금을 밀어 올려놓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아파트 세입자들은 “올해 2월 아파트 실거주 의무를 ‘3년 유예’하는 주택법 개정안이 통과됐는데도 국토부가 ‘전매제한’ 규정을 명확하게 하지 않아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막혔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이 54주째 올랐는데도 국토부가 빌라 전세시장 안정과 전세제도 개편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심지어 스타트업 업계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정부가 공급과 수요를 결정하고 가격을 통제하는 기존 대중교통 체제를 감싸고돌아 우버와 같은 ‘모빌리티(이동성) 혁신’이 일어나지 못한다”고 국토부를 탓한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행동으로 보여야
박 장관은 국토부 주택정책과장 주택토지실장을 거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으로 일한 주택 정책 전문가다. 그의 화려한 경력만으로도 부동산 정책과 시장의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기 어렵다. 그간 ‘주거’와 ‘이동성’이라는 현장 수요자의 관점보다 ‘국토’와 ‘교통’이라는 공급자 시각에서 일한 건 아닌지 업무 전반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에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팻말이 놓여 있다. 권한에 맞게 책임지고 일한다는 거 아닌가. 장관의 일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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