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과학자는 확률을 말할 뿐… 확신에 차 미래 말하는 자 경계해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6일 23시 18분


코멘트

‘다정한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
‘기술 미래’ 제대로 예측된 적 없어… 변하지 않을 것 찾아 자원 투자해야
영역별 경계는 편의상 그어놓은 것… 자꾸 왔다 갔다 하면 새 길이 생겨

물리학자’, ‘작가’, ‘과학 커뮤니케이터’ 등으로 불리는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선이라는 게 편의상 그어놓은 것이지 자꾸 넘으면 없어진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양자역학을 쉽게 설명하는 물리학자’ ‘철학하는 과학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에게는 수식어가 많다. 다양한 인문·교양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들이 더 잘 아는 과학자다. 그래서 5월 28일 만나자마자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었다.

“21년 차 교수죠. 오랫동안 물리를 연구했고요. 이제는 과학을 알린다고 해야 하나. 강연할 때 작가로 소개하는 곳도 있어요.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사람이 된 건데, 또 언제부턴가는 꼭 규정해야 하나 생각도 해요. 규정하는 순간 제약을 받을 수 있잖아요.”

‘선’을 넘으면 한 영역에만 머물 때 보지 못했던 게 보인다는 과학자. 하지만 두 시간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김 교수는 미래 예측을 비롯해 ‘명쾌한 결론’을 기대하면 “과학을 오해하지 말라”면서 지독히도 신중했다. “객관적 근거 없이는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가 과학자로서 그가 지키는 ‘선’이고, 대중에게 전하려는 ‘과학적 사고’의 본질이었다.


‘종의 기원’의 찰스 다윈, ‘코스모스’의 칼 세이건, ‘시간의 역사’의 스티븐 호킹.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적인 과학자는 대중서를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다. 최근 과학자들은 대개 실험실을 무대로 논문으로만 말한다.

―동료 집단에서 연구실 밖 활동에 대한 논쟁도 있을 듯한데….

“언론이나 방송에 많이 나오는 과학자들에 대해선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해요. 어떤 분들은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해 주시고, 또 제 앞에서는 아니지만 뒤에서 ‘저런 시간에 연구를 할 것이지’, ‘저게 교수냐’ 얘기를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왜 ‘훌륭한 과학자’보다 ‘잘 알려진 과학자’의 길을 걷기로 했나요.

“물리 같은 기초과학은 정부 주도로 다질 수밖에 없어요. 한국에는 기초과학에 기부하는 독지가도 잘 없고, 기업들도 거의 나서지 않거든요. 결국 세금이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고, 국민들이 반대하면 길이 보이지 않는 구조예요. 물리연구소를 세운다거나 우주 탐사를 위한 발사체를 개발하려는데 국회의 예산안 심의에서 ‘도대체 이 지원을 왜 하느냐?’고 하면 방어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기초과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과학기술이 우리가 알아야 할 이 시대의 중요한 교양이라는 생각도 깔려 있고요.”

‘훔볼트상’을 수상한 양자물리 권위자 김명식 영국 임피리얼칼리지런던(ICL) 교수는 기초과학 인재 풀을 넓히려면 “김 교수 같은 스타 과학자를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대 쏠림, 이공계 기피가 심각한 상황에서 ‘기초과학이 재밌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는 취지다.

―기초과학을 쉽게 알리는 활동이 인재 수급에 도움이 될까요.

“지금 인공지능(AI)을 공부한다고 하면 누구도 말리지 않을 거예요. 다들 미래가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건 중요하죠. 문제는 그러면 너무 늦다는 거예요. 10년, 20년 뒤에야 인력이 배출되는 건데, 일단 지원을 해서 일정 규모의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하는 접근이 필요해요.”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전면 폐지 방침은 효과가 있을까요?

“예타가 시간을 다투는 연구조차 발목을 잡을 때가 있어서 이 절차를 개선하자는 게 과학자들의 목소리였어요. 그렇다고 아예 없애버리는 건 아니잖아요. 과속 방지턱이 너무 높아 차가 망가질 정도니까 고치자고 한 건데…. 예타를 없애면 ‘정치과학자’들이 날뛴다거나 걱정했던 문제가 터질 수 있어요. 더군다나 예타는 사업비 500억 원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예요. 다수의 과학자와는 상관이 없어요. R&D 예산이 줄어 현장에 돈이 없다는 게 문제인데 엉뚱한 해법이죠.”

―왜 전공자도 아닌 일반인이 과학을 알아야 하나요.

“과학은 ‘방법’이에요. 객관적이고, 재현 가능한, 물질적 증거에만 기반해 결론을 내리는 태도를 말하죠. 그래서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말했는지’가 아니라 ‘증거가 무엇인지’예요. 아인슈타인이 말해도 증거가 없으면 소용 없어요.”

―그런 ‘과학자의 시선’에서 볼 때 현재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요.

“물질적 증거에 입각해 행동한다는 것은, 누가 무슨 말을 할 때 ‘어디서 들었어?’ ‘직접 본 거야?’ 의심을 해본다는 뜻이에요. 쉽게 공감하지 않고요. 이러니까 사람들이 과학자를 싫어하지. (웃음) 충분한 데이터나 증거가 있을 때까지 결론을 유보하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우리 편’이 하는 얘기는 믿고, ‘우리 편’이 아니면 안 믿잖아요.”

―사회 현상에도 과학적 태도를 적용할 수 있나요? 일례로 참사가 났을 때 그 원인과 책임을 과학적으로 따지는 게 쉽지 않은데….

“사실 많은 결정은 정치가 내리는 거예요. 과학의 역할은 그 정치적 합의를 위한 객관적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이고요. 데이터는 ‘불확정성’이 커서 그 자체로 결론을 말해주지 않아요. 과학자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는 있어도 사용에 대해서 결정을 내릴 수 없어요. 사회가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당할 것인지는 정치의 문제예요.”

―과학자나 전문가가 내놓는 증거들이 다르기도 해요.

“과학자의 영역은 예를 들어 ‘원전이 90% 확률로 안전하고, 10% 확률로 안전하지 않다’면 거짓 없이 그대로 얘기하는 거예요. 자신이 좌파라고 해서 ‘완전히 위험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되고요.”

―현안에 직접 참전하는 과학자들도 있는데….

“그때는 과학자로서보다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운동을 하는 거예요. 저도 물리학자지 원전은 잘 모르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원전에 찬성이나 반대 입장을 강하게 말한다면 그건 운동이죠. 그러니 ‘저 사람은 물리학자고, 이 문제는 과학 문제니까 저 사람이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라고 섣불리 믿으면 안 돼요. 그건 과학을 오해하는 거예요.”

3월 엔비디아의 개발자 행사는 팝스타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AI발(發) 산업혁명이 시작됐다”는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의 연설을 들으러 1만여 명이 몰려들었다.

프랑스에서 1899년에 그려진 2000년 프랑스에 대한 상상도. 말이 끄는 마차를 근거로 2000년에는 고래가 끄는 수중버스를 떠올린 듯 한다. 김상욱 교수는 “과학기술의 미래는 역사상 제대로 예측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France in 2000 year (XXI century). Whale-bus. France, paper card by Jean-Marc Côté〉

―황 CEO, 오픈AI 샘 올트먼 CEO 등의 발언 파워가 엄청난데 어떻게 보나요.

“‘셀럽’이죠. 사람들은 영웅을 좋아하니까…. 그들의 말을 잘 들으면 돈이 보이니까 당연하죠. 그들의 말에 수천억, 수조 원의 돈이 움직이잖아요. 성공한 기업가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말을 하면 턱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산업혁명과 같은 평가는 시간이 흐른 뒤에나 할 수 있어요. 또 과학기술의 미래를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같은 소수의 미국 중심 사기업이 결정하게 놔둬서도 안 되고요,”

―강연에서 ‘미래는 예측 가능하지 않다’고 설파하는데….

“너무 강력하게 의견을 펴는 과학자들, 특히 미래에 대한 문제에 확신하는 사람은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아요. AI의 미래? 아무도 몰라요. 과학자들도 몰라요. 관련 기업들은 하자고 하겠죠. 하지만 미래에 대해 확신에 차 예측하는 사람은 그런 미래가 펼쳐졌을 때 이익을 볼 사람들이에요. 과학기술의 미래는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예측된 적이 없어요.”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고, 무엇을 해야 하나요.

“하려는 말은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는 게 어려우니 예측에 너무 많은 자원을 쏟지 말라는 거예요. 변하지 않는 것부터 먼저 챙기고, 어떤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게 더 중요해요. 다음에 올 바이러스를 예측해 미리 백신을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어떤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안정적으로 백신을 수급할 수 있는 망과 프로토콜을 갖추는 게 더 필요한 거죠.”

김 교수는 ‘변하지 않는 것’의 예시를 들며 “300쪽짜리 책을 읽고, 한 장으로 요약하며 얻는 지식과 역량”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인터뷰 녹음에 활용하는 네이버 ‘클로바노트’도 순식간에 요약할 텐데요.

“기능 자체는 기계가 해줄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요약을 하려는 게 아니고, 이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역량을 얻는 것이거든요. 인생에서 숱한 결정을 기계가 해줄 수는 없겠죠. 일정한 기능이나 능력을 기계가 더 가져가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 기능만을 하는 존재가 인간은 아니예요.”

펜을 떼지 않고 단 4개의 선으로 9개의 점을 모두 연결하는 방법은? 김상욱 교수의 “문제 밖으로 나가서 보라”가 힌트다.
펜을 떼지 않고 단 4개의 선으로 9개의 점을 모두 연결하는 방법은? 김상욱 교수의 “문제 밖으로 나가서 보라”가 힌트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틀에 갇힌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어렵지만 조금만 달리 문제를 다르게 바라본다면 곧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선을 점 바깥까지 그려 잇는 것이다. 선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색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라는 메시지를 준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한 우물형’ 스페셜리스트가 각광받기도 하는데, 왜 선을 넘어야 하나요.

“우리는 어릴 때 모두 과학자였어요. 저도 새가 하늘을 나는 게 궁금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새의 움직임(물리)을 연구하는 건 되지만 새의 날개(생물)를 연구하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데 선이라는 게 편의상 그어놓은 것이잖아요. 제가 선을 넘는 이유는 원래 선은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예요. 자꾸 왔다 갔다 하면 거기 길이 생겨요.”

물리학자 김상욱(54)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물리학자 김상욱(54)
△KAIST 물리학 학사, 석사, 박사
△2001~2003년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방문연구원
△2004~2018년 부산대 물리교육과 교수
△2018년~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방송 ‘알쓸신잡’ ‘알쓸범잡’ 등 출연
△저서 ‘떨림과 울림’(201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2023년) 등


#데스크가 만난 사람#김상욱 교수#물리학자#양자역학#과학적 사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