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 추진 ‘상법 개정’ 힘 실은 이복현
재계 반발에 이번엔 “배임죄 폐지”
경제부총리-법무장관 다 제치고
금감원장이 ‘감 놔라 대추 놔라’ 옳나
델라웨어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크기가 작은 주다.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하다. 미국인들조차 어디에 붙어 있는지 잘 모른다는 델라웨어의 ‘회사법’이 한국 재계와 법조계의 뜨거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일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21대 국회에서 델라웨어 회사법을 모델로 상법 개정을 추진하면서부터다.
민주당이 22대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법 개정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됐는데, 최근 윤석열 정부의 실세로 통하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까지 더불어 ‘총대’를 메고 나서면서 법 개정의 영향권에 들게 된 기업들의 ‘불안 지수’는 급격히 치솟고 있다.
상법 개정안의 내용은 이사가 ‘충실(loyalty) 의무’를 지켜야 할 대상을 기존의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한 단어가 추가되는 것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사와 회사, 이사와 주주, 회사와 주주 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는 ‘대지진급 변화’이다 보니 기업계에서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예컨대 주주 중에는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이야 어찌 되건 단기적인 배당과 시세차익 확대에만 관심을 두는 주주들도 있는데, ‘주주’라는 이름으로 이들에 대한 충실 의무까지 상법에 명문화된다면 ‘리스크’를 동반한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은 할 엄두를 못 내게 된다는 것이 기업계의 우려다. 특히 해외 투기자본들이 적은 지분만으로도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지렛대 삼아 한국 대기업을 상대로 무더기 소송전을 하는 데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의문은 기업 환경과 토양이 다른 델라웨어의 회사법을 베끼다시피 한국으로 ‘이식’하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델라웨어는 기업에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곳이다. 정해진 양식만 채워 넣으면 1시간 안에 법인 설립이 가능하다. 증빙자료는 전혀 필요 없다. 실명(實名)도 필요 없고, 사무실도 필요 없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2층짜리 건물에 30만 개가 넘는 기업이 주소지를 두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의 기업인들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식 배임죄로 처벌당할 일을 걱정할 일도 없다. 포이즌 필(적대적 M&A에 대항해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으로 지분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처럼 강력한 경영권 방어장치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같은 것 하나쯤 회사법에 명시돼 있다고 해서 기업 활동에 짐이 될 일은 없다. 하지만 이중삼중의 처벌과 규제에 변변한 경영권 방어장치 하나 없는 한국은 다르다.
이 원장은 상법 개정에 대한 자신의 발언으로 재계 반발이 거세지자 14일 ‘배임죄 폐지 병행론’을 들고나왔다. 배임죄는 주요 선진국 어디에도 없는 제도이고, 배임죄로 인해 이사의 의사결정이 과도하게 형사처벌 대상이 되고 있다는 취지다. 이것만 놓고 보면 일리 있는 이야기다. 배임죄는 폐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의적인 구성요건과 과도한 형량에 대해서는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배임죄 폐지와 상법 개정이 등가(等價)로 맞바꿀 사안인가. 배임죄만 없애면 상법 개정에 따른 부작용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인가. 입법권을 장악한 민주당을 설득해 배임죄 폐지를 실현할 전략과 능력은 있나. 배임죄는 상법 개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폐지 또는 개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 꼬리를 무는 의문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게 소관도 아닌 ‘차관급’ 금감원장이 책임 있게 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현행법에 금융감독원은 ‘금융위원회나 증권선물위원회의 지도·감독을 받아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 업무 등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규정돼 있다. 금감원장의 역할을 아무리 확대 해석해 봐도 상법 및 형법 개정과 같은 중대 현안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서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기업 경영 패러다임을 바꾸는, 이 정도 사안이라면 주무 장관인 법무부 장관이나 경제 운용을 총괄하는 경제부총리가 설명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야 불필요한 혼선과 동요, 국정 난맥을 막을 수 있다.
이 원장은 최근 “세제가 됐건 회사법 이슈가 됐건 상류에 있는 공장에서 폐수가 흘러들어서, 발생은 거기에서 하지만 하류를 거쳐 가면서 저희가 경작하는 들판에 영향을 강하게 미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인식이면 앞으로도 부총리나 주무 장관들을 제쳐두고 자신이 앞장서 나서겠다는 신호로 읽히는데, 여야 합의로 만든 법안을 폐수에 비유하는 것이 공직자로서 합당한 태도인지, ‘상류’에는 나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본적인 질문부터 스스로 던져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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