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남자 되면 좋은 ‘남자의 방’ 얻는다[정성갑의 공간의 재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20일 2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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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함께 강연한 건축가에게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단독주택 설계를 의뢰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는 부부가 종종 있는데 설계가 궤도에 오르고 좌충우돌 조정과 변경을 거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공간이 ‘남자의 방’이라는 거다. 최선을 다하다가 끝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로 결론이 나면 덜 슬프겠지만 대부분은 아주 간단하고 신속하게 결정이 난다고.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씁쓸했다. 나도 남자이니 남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쑥쑥 오르는 아파트 값에 눈이 멀어 분양권을 사 놓고 엄마 집에 들어가 약 2년을 산 적이 있다. 첫째 아이가 이제 막 돌을 지날 무렵이었는데 아기띠에 아이를 안고 두 손으로는 이런저런 짐을 들고 있는 나를 보며 윗집 아주머니가 한 말이 있다. “요즘은 남자들이 참 불쌍해. 밖에서는 돈 버느라 힘들어, 집에 오면 또 가사 돌보느라 힘들어.” 거기까지 들었을 때만 해도 이분이 유독 측은지심이 넘치는 분인 줄로만 알았다. 그 뒤에 따라 나온 말은 이랬다. “그러게 남자들아, 여자들한테 좀 잘하지 그랬냐. 그렇게 사람대접 안 해 주고 고생만 시키더니. 이게 다 옛날 남자들이 쌓은 업보다 업보야.” 남자들아∼ 하시는데, 내 뒤에 누가 있는 줄 알았다.

어제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집을 짓고 사는 분의 초대를 받아 다녀왔다. 전망은 역시 높은 곳에 있었다. 암벽을 깎아 만든 정원은 단차가 있어 아름다웠고 옥상에 올라가니 왼쪽부터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가장 ‘아름다웠던’ 건 아내의 방과 남편의 방이 따로 있었다는 것. 그림 그리기와 이끼 정원 가꾸기가 취미인 아내의 방은 각종 식물과 그림으로 아기자기했고 건축가인 남편의 서재는 수많은 건축 서적으로 근사했다. 쪽마당에는 캠핑 의자 두어 개를 놔뒀는데 오후의 빛이 그곳을 지나 서재 안쪽까지 일렁이듯 들어오고 있었다. “소소하게 살고 있다”는 남편분의 말에 “무슨요? 진짜 성공하신 거예요. 요즘 이렇게 내 공간을 갖고 있는 남자가 많지 않아요. 끝내 지켜 내신 것만으로 대단하신 거예요”라며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와, 진짜 복 받으신 분’ 하며 남편분의 공간을 복기하는데 그가 차를 마시며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혼 때였나? 아내와 지방으로 여행을 갔는데 건물 한 층이 갤러리이고 그 밑층은 건축사 사무실로 쓰고 있는 건물이 있었는데 너무 보기 좋더라고요. 그때 아내에게 그랬어요. ‘여보, 내가 이런 건물 꼭 지어줄게.’” 서울 강남 송파에서 살던 시절을 정리하고 아파트를 팔아 자금을 만든 그들은 결국 부암동에 건물을 올렸고 실제 한 층은 갤러리 사업자에게 임대를 주고 있다. 아내 입장에서 남편은 함께 꿈을 꾼 사람이고, 또 열심히 일해서 그 꿈을 이룬 사람이니 사랑방 하나쯤 못 내어주랴. 아내분이 현명한 것이 자기만의 공간에서 충분히 쉬고 행복한 남자들은 그 시간이 감사하고 미안해서라도 아내에게 더 잘한다.

고백하자면 이 칼럼의 처음 제목은 이랬다. ‘남자들에게도 공간을.’ 쓰다 보니 묘하게 시대착오적이었고, 그러면 여자들에게는 공간이 필요 없나? 뭇매를 맞을 것 같았다. 설익은 생각을 정리하고 곱씹어 보니 역시 인생사, 나 하기 나름. 얻고 싶으면 먼저 좋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
#좋은 남자#남자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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