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인을 그리며[이준식의 한시 한 수]〈269〉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20일 22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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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산에 자칭 광객(狂客)이 있었으니, 풍류로 이름난 하계진(賀季眞)이지.
장안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를 ‘하늘에서 쫓겨난 신선’이라 불러주었지.
그 옛날 그리도 술 좋아하시더니, 이제 소나무 아래 흙으로 돌아갔네.
금 장식 거북으로 술 바꿔 마시던 곳, 그 추억에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
(四明有狂客, 風流賀季眞. 長安一相見, 呼我謫仙人. 昔好杯中物, 今爲松下塵. 金龜換酒處, 却憶淚沾巾.)


―‘술을 앞에 놓고 하 대감을 그리다(대주억하감·對酒憶賀監)’

하지장은 이백이 벼슬길에 드는 데 직접 도움을 주었고 최초로 ‘시선(詩仙)’이란 영예도 부여했던 지음(知音). 술을 마주한 시인은 지금 그 고마운 인연을 되씹고 있다. 객지를 유람하다 갓 장안에 온 마흔 초반의 이백, 하지장과의 첫 대면에서 그는 장편시 ‘촉으로 가는 험난한 길(촉도난·蜀道難)’을 선보였다.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과 과장법을 동원하여 촉 지방의 험난한 지형과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대비적으로 묘사한 시다. 이 시를 읽으며 하지장은 연거푸 찬사를 쏟아냈고 ‘하늘에서 쫓겨난 신선’이라고까지 치켜세웠다. 뿐인가. 그 길로 이백을 술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술값이 없자 ‘금 장식 거북’을 풀었다. 3품 이상 관리가 패용하는 신분 표지물이었다. 벼슬 없는 신출내기 선비가 마흔둘이나 많은 고관대작으로부터 이런 극찬과 술대접을 받았으니 그 감개가 오죽했으랴.

50년 이상 관직에 있으면서도 소탈하고 풍류를 즐겨 스스로 ‘사명광객(四明狂客)’이란 호를 썼던 하지장, 계진은 그의 자. 옛 선비들은 상대방의 이름 대신 자나 관직명을 부르는 걸 예법으로 여겼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은인#그리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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