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반지하에 묶여 잠 못드는 피해 청년들 [횡설수설/우경임]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21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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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지만 별수 있나요. 그저 버틸 수밖에요.” 동아일보가 장마철을 앞두고 전세사기 피해 건물을 돌아봤더니 임대인이 잠적해 방치된 탓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한 건물이 수두룩했다. 전국적인 전세사기 피해가 공론화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끝나지 않고 있다. 보증금을 떼이고 빚더미 수렁에 빠진 피해자는 하루하루를 정말 어렵게 버티고 있다. 지긋지긋하지만 집을 떠날 수도 없다. 피해자 대다수가 관리되지 않는 부실 건물에서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인천 계양구 하모 씨의 반지하 집은 문을 열면 복도에 물이 찰랑거린다. 하루 3번 펌프를 돌리며 버티고 있다. 그는 전세사기로 보증금 8000만 원을 떼이고 투잡, 스리잡을 하며 빚을 갚고 있다. 돈이 드는 수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부산 수영구 정모 씨는 오피스텔 현관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놓고 산다. 지난해 장마 당시 배수시설이 미흡해 물이 넘쳤던 악몽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다. 그 역시 대출금을 고스란히 날리고 갈 곳이 없어 버티고 있다. 전국 곳곳에 소방관로가 터졌거나 외벽 마감재가 떨어졌는데도 임대인이 잠적해 관리가 중단된 건물이 있었다.

▷5월 기준 전세사기 피해자는 1만6606명이고, 이들의 10명 중 7명은 2030 청년층이다. 사기를 당한 것도, 그래서 집주인 빚을 떠안은 것도 억울한데 누수, 균열, 승강기 고장 등 건물 관리 부실의 피해까지 감내하고 있다. 전세사기 전국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피해자 절반 이상이 열악한 주거 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 수준으로 번진 것은 제도적 맹점을 방치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다가구의 경우, 등기부 등본을 봐도 선순위 대출이나 다른 전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전세보증보험도 허술하게 관리돼 피해를 키웠다. 나태한 행정으로 전세사기를 방치한 정부가 장마철 홍수 피해가 걱정되는 위험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17개 시도 중 피해자가 사는 건물에 대한 실태조사가 일부라도 이뤄진 곳은 5개 시도뿐이었다.

▷사회에 갓 진출한 2030 청년들이 저축을 깨고 대출을 받아 마련한 집이었다. 그 집은 이제 ‘전세 지옥’이라고 불린다. 반지하나 옥탑방을 벗어나 그저 조금 햇빛이 잘 들고 깨끗한 보금자리를 꿈꾼 대가로서는 너무 가혹하다. 피해자들은 “승강기, 소방시설, 전기 설비 등의 안전 관리를 지자체가 지원해 주거나, 비용 보조를 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혹시 무너질까, 물이 넘칠까 하는 걱정에 피해자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지 않도록 지자체가 최소한 시설 안전만큼은 지원에 나섰으면 한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전세사기#청년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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