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사무역기구는 6월 13일 목재를 운송 중이던 팔라우 선적의 우크라이나 화물선 버베나가 예멘 후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5월 17일에는 후티의 대변인 야흐야 사리가 미군의 무인기 MQ-9 프레데터 1대를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2014년 이래 최소 5대의 무인기를 후티에 잃었다. 후티는 작년 11월 바하마 선적의 영국 로로선(컨테이너선의 일종) 갤럭시 리더를 마치 영화처럼 헬리콥터에서 강하한 병력으로 나포한 이래 홍해에서 상선을 계속 공격해 왔다. 갤럭시 리더가 이스라엘인 억만장자 아브라함 웅가르의 소유라는 게 공격의 명분이었다. 후티는 작년에 다시 불붙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을 맹렬히 비난해 왔다. 갤럭시 리더의 25명 선원 전부는 아직 억류돼 있고 배는 예멘 서부의 항구 도시 호데이다에 정박돼 있다. 배에 올라타 둘러보는 입장료는 약 1300원이다.》
예멘의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남서쪽에 면한 예멘의 서부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예멘왕국으로 독립했다. 그게 원래 예멘의 전부는 아니었는데 동부 지역은 183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봄베이군이 점령한 이래로 아덴보호령이라 불렸다. 1962년 군사 쿠데타 후 예멘왕국은 북예멘, 즉 예멘아랍공화국이 되었고 1967년 아덴보호령은 남예멘, 즉 예멘인민민주공화국이 되었다. 1970년대 짧은 전쟁을 두 번 치렀음에도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던 두 예멘은 1990년 예멘공화국으로 합쳤다. 1994년 불만이 생긴 과거의 남예멘 지도부는 내전을 일으켰지만 약 두 달 만에 패했다.
2011년 ‘아랍의 봄’은 예멘의 누적된 부조리에 불을 댕겼다. 전임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1978년에 북예멘 대통령이 된 대령 알리 압둘라 살레는 33년째 자리를 지켰다. 또 자신의 아들이 대통령직을 물려받도록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게다가 살레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후세인 알 후티를 2004년 암살했다. ‘신의 지지자들’이라는 예멘 반정부 운동의 지도자였던 후세인 알 후티는 이로써 순교자가 되었다. 북예멘의 북부 산악 지역에 기반을 둔 후티 부족은 시아 이슬람이었다.
2012년 살레는 1994년부터 부통령이었던 압드랍부 만수르 하디를 후임 대통령으로 만들며 물러났다. 후세인 알 후티의 스무 살 어린 친동생인 압둘말리크 알 후티가 이끄는 신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눈 가리고 아웅’을 인정할 수 없었다. 후티 세력은 2014년 예멘의 수도인 사나를 점령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2015년 하디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그 직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군사 개입을 해 과거의 남예멘에 하디의 정부를 유지했다. 이후 예멘은 후티가 장악한 북예멘과 그렇지 않은 남예멘으로 나뉘어 다시 내전 중이다.
홍해의 상선을 대상으로 하는 후티의 공격은 전쟁 행위일까? 후티 반군은 대외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배를 공격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력을 보면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은 이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 매슈 밀러는 2월 21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이를 “해적질”로 규정했다.
해적은 역사가 실로 깊다. 기원전 1세기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시칠리아 해적에게 잡힌 적이 있었다. 해적이 20달란트를 요구하자 자기 몸값이 그거밖에 안 되냐며 50달란트로 올리고 풀려난 후 곧바로 그 해적을 토벌했다고 플루타르크는 전한다. 동양에도 해적이 있었다. 가령 조선 효종 때인 1657년 복건(福建·푸젠)에 있는 주 씨를 돕는 해적인 정지룡의 아들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정지룡은 명에서 태어나 필리핀과 일본을 근거로 삼은 해적이었다. 그가 나가사키의 일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1662년 대만 본섬을 최초로 점령한 명의 잔당인 정성공이었다.
해적은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특히 21세기 초반 소말리아 해적의 발흥은 국제적인 골칫거리였다. 견디다 못한 각국은 해군 함정을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 파견해 해적을 소탕해 왔다. 그 결과 소말리아 해적의 공격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일례로 올 3월 12일에 나포된 방글라데시 벌크선 압둘라는 4월 14일에야 풀려났다. 해적이 요구한 몸값 약 70억 원이 든 돈 자루를 선사가 비행기를 이용해 배에 떨어뜨린 뒤의 일이었다.
해적의 목표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인질을 잡고 몸값을 요구하는 건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유구한 고전적 해적 행위다. 물론 화물을 뺏거나 배를 탈취해 현금화하는 방법도 있다. 또 사람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일도 수지맞는 해적의 중요한 돈벌이였다. 즉, 해적의 목표는 오로지 돈이다.
어떤 집단이 해적인지 아닌지에서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가령 십자군 전쟁 때 생긴 구호기사단은 13세기에 동로마 영토인 로도스를 빼앗았고 16세기에 로도스를 뺏긴 후에는 몰타에 자리 잡았다. 구호기사단은 이슬람과 베네치아 상선을 가리지 않는 해적질로 악명 높았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들을 두고 “겉으로만 십자가 행진을 하는 코르세르(해적)”라고 일갈했다.
해적을 단순히 굶주림을 면하고자 노략질에 나선 사람들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일례로 911년 서프랑크 왕 샤를 3세에 의해 노르망디 백작에 봉해진 롤로는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지속적으로 약탈하던 스칸디나비아 태생의 바이킹으로서 본래 해적이었다. 롤로의 5대손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해 영국 왕 윌리엄 1세가 되었다. 또 신대륙 발견 후 스페인의 귀금속이 탐났던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는 타국의 배를 약탈할 면허를 자국 해적들에게 부여했다. 이는 무력의 외주화로서 과실은 따먹되 도발 행위의 책임은 국가가 면해 보려는 시도였다. 영국인들은 그러한 사략선장의 대표 격인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영웅으로 받들었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일명 무적함대를 운 좋게 물리친 영국은 해적 행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수행할 방법을 고안해 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자본을 댄 회사에 식민지로 만들 지역의 독점권을 주고 그 면허료를 받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1600년에 세워진 첫 번째 영국 회사가 바로 영국 동인도회사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 시 주주는 모두 219명이었다. 그중 한 명으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첫 번째 식민 함대를 지휘한 제임스 랭커스터는 드레이크 밑에서 사략선을 탔던 해적 선장이었다.
비슷한 영국 회사 중 다른 방식으로 이름을 날린 회사로 1711년에 설립된 남해회사가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해회사의 독점권은 남해, 즉 남반구 전체의 바다와 남아메리카였다. 아프리카인을 잡아다가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 노예로 팔겠다는 남해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은 스페인과 전쟁 중인 영국의 상황을 감안하면 망상에 가까웠다. 오히려 그러한 암울한 전망이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남해회사의 주가는 1720년 단 몇 달 만에 열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가 폭락했다. 당시 영국 조폐청장으로서 금화 위조범 처형에 진심이었던 아이작 뉴턴은 남해회사 주식에 손을 댔다가 오늘날 돈 가치로 약 80억 원을 날렸다.
후티를 해적으로 규정 짓고 싶어 하는 미국은 후티가 몸값을 받았다는 군불을 계속 때고 있다. 가령 불법 도청이 들통나 대통령을 그만둔 리처드 닉슨이 세운 잡지 더내셔널인터레스트는 올 3월 레바논 벌크선 루비마르가 가라앉기 전 후티가 구조를 허락하는 대신 돈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이 잡지는 소말리아의 해적과 후티가 연대해서 몸값을 나눌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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