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전쟁의 불길에서 문화재 지켜낸 차일혁 경무관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24일 22시 48분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파죽지세였던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발이 묶입니다. 그리고 그해 9월 한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돼 퇴각하게 됩니다. 이때 퇴로를 차단당해 미처 돌아가지 못한 패잔병들은 산으로 들어가 기존의 좌익유격대에 합류했는데 이들이 바로 빨치산입니다. 이들 때문에 국군과 함께 빨치산을 토벌할 ‘전투경찰대’가 창설됐는데 차일혁 경무관(1920∼1958·사진)은 바로 이 빨치산 토벌대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충남 홍성에서 자란 차 경무관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조선인 교사가 끌려가면서 부당하게 당하는 걸 보고 일본 고등계 형사를 때렸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17세의 나이로 중국에 망명한 그는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하고 이후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광복 직전까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 활동을 했습니다.

독립 후 귀국한 차 경무관은 경찰에 투신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빨치산 토벌대장이 됐습니다. 1951년 1월 2000여 명의 빨치산들이 정읍 칠보발전소를 포위하자 차일혁은 단 75명의 경찰병력만으로 이를 막는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해 5월 화엄사 지역 방어 책임을 맡고 있던 차 경무관은 상부로부터 지리산에 있는 모든 절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빨치산들의 은거지가 될 만한 곳을 미리 없애는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천년 고찰이자 문화재인 화엄사마저 한 줌의 재로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차 경무관은 명령의 핵심이 ‘빨치산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쉽게 하는 것’이니 대웅전을 비롯해 각 건물의 문짝만 뜯어서 태워도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방득윤 대대장도 동의했고 결국 화엄사는 문짝만 불탄 채 살아남았습니다. 덕분에 인근 천은사나 쌍계사, 선운사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하마터면 잿더미가 될 뻔했던 화엄사 각황전이 지금의 국보 67호입니다.

6·25전쟁의 불길에서 문화재를 지킨 그의 공은 사망 후에야 인정을 받았습니다. 2011년 뒤늦게 경무관으로 1계급 특진 추서됐고, 2013년에야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돼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됐습니다. 화엄사에 서 있는 그의 공적비(1998년)는 오늘도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6.25전쟁#문화재#차일혁 경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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