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인 리처드 리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먼들과 생활했을 때다. 그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알려는 마음에 외부에서 가져온 음식을 나누는 것도 삼가다 보니 구두쇠라는 평판이 생겼다. 먹을 게 귀해 무엇이든 같이 먹고 나눠 먹는 이들의 눈에 맛있는 통조림을 두 달 치씩 쌓아 놓고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3년쯤 되어 떠날 날이 다가왔을 때 큰맘 먹고 한 턱 쏘기로 했다. 커다란 황소를 사서 선물한 것이다. 550kg 정도는 너끈하게 나갈 것 같아 1인당 2kg씩은 먹을 듯했다. 우리나라 식당에서 파는 고기 1인분이 150∼200g이니 풍족하고도 남는 양이다. 소문이 좍 퍼지면서 만나는 이들마다 그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그런데 기대했던 말이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늙고 말라빠진 황소를 고르다니∼.” “(고기가 부족해) 사람들이 싸우면 어쩔 거요?”
하나같이 이렇게 지적하고 불평하니 아무래도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 같아 한 마리를 더 구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동안 사냥한 고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심각한 긴장이 발생한 걸 본 적도 있기에 하는 수 없이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위로를 건넸다. “뭐 마르긴 했지만 뼈로 국을 끓이면 될 거요.” 분명 부족할 거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안 가득한 그의 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이틀 밤낮 동안 충분히 축제를 즐겼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물은 다음에야 그동안 몰랐던 그들의 문화를 알게 되었다. 큰일을 해낸 사람을 모욕하는 게 일종의 의무라는 걸 말이다. 아니, 좋은 일을 한 사람을 모욕하는 게 의무라니, 역시 미개한 사람들이었던 걸까? 주민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사냥을 잘하는 사람은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죠. 잘난 체하고 교만한 이런 사람을 그냥 둬서는 절대 안 돼요. 이런 교만이나 자만심이 언젠가 우리 중 누군가를 죽일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러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겸손하라고 말이죠.”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조지프 A 테인터 미국 유타대 교수는 이 에피소드를 예로 들며 평등한 협력만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에서는 자기 과시가 허용되지 않는 게 보통이라고 했는데, 우리 역시 귀담아들어야 할 말 같다. 이렇게 보면 젊은 세대들이 왜 꼰대라는 말을 ‘애용’하는지 짐작할 수도 있다.
예전엔 살아가면서 얻는 경험이 중요했기에 나이가 벼슬이고, 지위가 권력이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정보 탐색과 활용 능력은 요즘 세대들이 훨씬 낫다. 기성세대가 이들에게 배우는 ‘역(逆)멘토링’이 흔해질 정도다. 젊은 세대들로선 평등을 외칠 만한 상황인데 나이 많고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힘을 행사하고 강요하니 반발심이 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격변하는 세상은 평등한 협력을 요구한다. 세상이 변하니 우리 역시 그러는 게 순리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