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 11% 삭감된 주요 연구개발(R&D) 예산을 내년에는 작년 수준으로 늘리기로 했다. 국가 R&D 예산은 지난해 6월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먹기,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한 걸 계기로 크게 줄면서 대학과 과학·기술 생태계에 심각한 충격을 준 바 있다. 파문이 커지자 대통령실은 올해 4·10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내년도 R&D 예산을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할 것”이라고 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어제 확정한 내년도 ‘주요 R&D 예산’은 24조8000억 원이다. 작년보다 1000억 원 많고, 올해에 비해서는 2조9000억 원 늘어난 규모다. 올해 14.7%나 줄어든 대학연구비 등 일반 R&D 포함 ‘전체 R&D 예산’도 2023년의 31조1000억 원 수준으로 복구될 전망이라고 한다.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늘렸던 R&D 예산을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 줄인 부작용은 적지 않았다. 대학에 배당되는 연구비들이 20%가량 일괄 삭감되면서 많은 대학원생, 연구원들이 연구실을 떠나야 했고, 장기 투자가 필요한 기초과학 연구가 멈춰 서는 일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내년 예산 복구, 증액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적절한 곳에 제대로 투입되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이번에 정부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 첨단바이오 3대 분야에 내년 주요 R&D 예산의 14%를 몰아주기로 했다. 또 이들 분야 R&D 속도를 높이기 위해 500억 원 이상 예산이 들 때 받아야 하는 예비타당성 조사까지 면제해 준다. 대통령이 R&D 국제협력을 강조한 뒤 한두 주 만에 외국 연구자와의 공동연구 기획을 만드는 등 급조된 ‘부실 항목’이 우려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막대한 연구비가 특정 분야에 쏠리는 만큼 예산을 낭비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후 감시가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
R&D 예산을 둘러싼 지난 1년간의 파행은 백년대계인 국가 과학·기술 투자에 정치적, 자의적 판단이 개입돼선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대학 및 과학·기술계도 소중한 국민 세금으로 만들어진 예산을 허튼 곳에 쓰는 일이 없도록 자정 기능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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