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총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기 화성시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들은 난관에 직면했다. 희생자들은 불길에 휩싸인 공장 건물 2층에 몰려 있었다.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외벽이 무너져 내부 진입이 불가능했다. 수색은 2시간 41분간 중단됐다. 리튬을 먹고 타오르는 불은 물로 끄기 어려웠다. 불길은 장시간 잡히지 않았다. 사고 발생으로부터 12시간 가까이 지난 당일 오후 9시 55분에서야 비상 대응 단계는 2단계에서 1단계로 내려갔다. 그때도 여전히 마지막 실종자를 못 찾은 상태였다.
사고 당일 현장에는 정치인들이 줄이어 찾아왔다. 시작은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로 출마한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었다. 그는 화재 발생 시간(오전 10시 31분)으로부터 약 7시간 20분 지난 오후 5시 50분경 찾아와 “희생자가 많을 수 있다고 해서 아무 정보 없이 일단 달려왔다”고 했다. 1시간 반 뒤인 오후 8시 50분경에는 국민의힘 지도부가, 다시 30분 뒤에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찾아왔다. 오후 10시 40분에는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인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도 찾아와 약 30분 동안 현장에 머물렀다. 정치인들은 카메라 앞에서 소방 당국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았고, 그 장면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런 풍경이 반복됐다.
이들은 정치가 상처받은 국민의 곁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누군가는 위로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여전히 마지막 실종자를 못 찾은 시점이었다. 정치인들이 재난 현장에 오면 안내, 의전, 브리핑, 그리고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해야 하는 배웅까지 현장 인력이 동원된다. 소방관의 본업은 사람을 살리고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지 의전과 보고가 아니다. 물론 이를 해야 할 상황도 있지만, 최소한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 순간에는 아니다. 실시간 화상 회의, 영상 통화까지 가능한 요즘에 정치인들이 현장에 나타나 보고를 받는 게 정말 필요했을까.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최소한 현장 수습이 끝난 뒤에, 소방관들이 숨이라도 돌릴 수 있었을 때 찾아왔어야 했다. 그래야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 방안도 논의할 수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정치권에서는 “정치인들이 직접 산소통 메고 들어가 구조 활동 할 계획이 아니라면 현장 방문은 자제해야 한다”는 자성론이 나왔다.
대형 재난 때마다 반복되는 정치인들의 현장 방문 이벤트는 인명 구조와 사고 수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소방 당국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나온다. 2021년 경기 이천시 쿠팡물류센터 화재 때 1명이 숨졌다. 당시 소방 당국 익명 게시판에는 “정치인이 방문하면 의전과 사진 촬영 등으로 수습 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직격하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방문을 최소화해 주시고 소방 공무원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도 호소했다. 그나마 몇몇 고위 인사들은 이런 사례들을 기억했는지 이번에는 사고 당일을 피해 방문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소방관들은 본업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방문이 뜸해진 사고 하루 뒤(지난달 25일) 오전 11시 52분, 소방관들은 마지막 실종자 시신을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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