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년 전, 엔비디아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기술진에 각각 미팅을 요청했다.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처리 용량이 점점 더 커지면서 초고성능 메모리칩의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만들던 기존의 범용 D램은 스펙이 어느 정도 표준화돼 있었기에 중앙처리장치(CPU)에 얹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이 새로운 메모리칩은 엔비디아의 GPU와 호환성, 안정성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엔비디아는 개발 초기부터 자사 기술진과의 로드맵 공유와 개발 협업을 요청했다. 글로벌 메모리 1등이자 그간 업계 기술 탈취와 유출을 숱하게 보아왔던 삼성은 이에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다. 반면 2등 SK하이닉스는 모든 청사진을 공유하겠다며 적극 협조에 나섰다. 2024년 현재 동네 어르신도 한 번씩은 들어봤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의 시작이다. 이를 들려준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당시 SK는 삼성에 비해 절박함이 있었다. 반면 삼성은 총수 부재 상황에서 수세적인 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기술 보안을 최우선해 온 삼성이 초기 개발 과정을 공유하긴 어려웠을 수 있다. 삼성은 1992년 12월 글로벌 D램 1위를 차지한 이래 30여 년간 CPU 시대에서 메모리 업계 최강자로 표준을 선도했다. 새로운 시장에서 고객사와 개발 단계에서부터 맞춰 나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낯섦도 있었을 것이다.
급성장하는 HBM 시장에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2등이 되어 보면서 삼성 안에선 당혹감이 새어 나온다. 처음 SK하이닉스가 4세대 HBM3를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한다는 소식이 쏟아질 때는 “초기 커뮤니케이션에서 밀렸다”는 질책이 있었다. 뒤이어 SK하이닉스가 5세대 HBM3E를 엔비디아에 납품할 즈음엔 ‘설마’ 했던 기술적 위기론이 회사를 흔들었다.
삼성이 메모리에서 30년의 1위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어쩌면 2등, 3등 기업이 갖고 있을 절박함은 흐려졌을지 모른다. 그 신호는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메모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모두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던 지난해 말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 인사팀은 근무 불량 사례를 대거 적발했다. 주 52시간 자율근무제를 악용해 사원증을 태깅(접촉)만 하고 집에 가는 식으로 연차를 아끼거나, 외부 미팅을 빌미로 외출해 개인 일정을 보는 식이었다. 개발 현장에서 “이 납기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데도 영업부서는 차마 상부 보고를 못 하니 수율이 기준 이하인 상황에서 고객사를 만나는 경우도 늘었다.
외부 파트너사에서도 신호는 오고 있다. 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중소 고객사를 대하는 TSMC와 삼성전자의 태도는 극명히 다르다. TSMC는 고객사 규모와 상관없이 세세한 부분까지 ‘을’의 자세로 챙기는데 삼성은 그렇지 않다”고 평가했다.
2019년 삼성은 글로벌 메모리 1위를 넘어 시스템 반도체 1위를 목표로 세웠다. 유일무이한 종합반도체 기업에 도전하는 동안 놓치는 부분은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원스톱 AI 솔루션을 제공할 것”이라는 목표를 실제로 만들고, 다시 고객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삼성은 지금 ‘2등의 절박함’을 되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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