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의 중심 주택가이며 조선조 정종이 동생인 태종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거처했던 연희궁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연희동에는 지나치리만큼 소박하면서도 수더분한 주점이 하나 있다.
올해 정확히 83세 되신 주인 할머니가 2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운영하고 있는 주점의 공식 이름은 야식포차. 하지만 단골들 사이에서는 굴다리 국숫집, 굴다리 포차 등으로 불리며 외려 낮술 손님이 더 많이 찾는 곳이다. 연희동 일대에는 단행본 출판사들이 많고 문필업이나 디자인 계통 프리랜서들도 적잖게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손님은 대개 출판사 직원이나 글쟁이, 디자이너들이다. 특히 야식포차에서 걸어서 닿을 만한 거리에 2009년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공간인 ‘연희문학창작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그곳에 상주하는 작가들도 무시로 드나들게 됐다. 연희문학창작촌 입주 작가 중 이 집을 찾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글의 타래가 잘 풀리지 않을 때는 털레털레 이곳에 와서 탁주 한 사발 먹으면서 영감의 도래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집이 문인들 사이에서 일종의 성지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입소문이 난 후로는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가 되기도 했는데, 주인 할머니는 그걸 부러 드러내지도 않는다.
연희동 야식포차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헐거움이다. ‘추리닝’ 바람으로 찾아가서 포차 앞 넓은 공터에 간이테이블을 펼쳐놓고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면, 직전까지 머릿속을 지배하던 골치 아픈 숙제들이 신기하게도 스르륵 풀려 나가는 느낌이다. 구속과 금기가 해제되는 기분이랄까.
이렇다 할 간판도 없고 출입문도 부실한데, 오랫동안 단골들 사이에서 무언의 협약으로 자리를 잡은 루틴이 이 집에 있다. 그것은 술과 술잔, 물과 물컵은 손님들이 직접 냉장고에서 꺼내 가야 한다는 거다. 심지어는 본안주가 나오기 전까지 주전부리로 삼을 오이와 당근 같은 것들은 손님이 주방에서 직접 썰어 가기도 한다. 손님들이 많을 때는 손님이 다른 손님상에 서빙을 하기도 하고 빈 그릇들을 치우기도 한다. 주인 할머니는 그만 수줍게 미소를 지으실 뿐이다.
이 집의 주메뉴는 조기매운탕, 골뱅이 소면, 파전, 두부전 등인데, 그 맛이 시골 재래시장의 소문난 백반집 저리 가라 할 정도다. 특히 개인적인 편애를 갖고 얘기하자면 골뱅이 소면은 서울에서 최고로 꼽을 만하다. 야채 등속에 섞은 오징어 진미채의 씹는 맛이 매콤한 소스에 감칠맛을 가미한다. 주인 할머니는 투박하지만 30년에 걸친 정확한 손끝의 감각으로 자신만의 손맛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연희동 손맛의 탄생이라 해도 좋으리라.
오래전 명동에는 술집 ‘은성’이라는 곳이 있었다. 탤런트 최불암의 모친 이명숙 여사가 운영하던 곳으로 박인환, 김수영, 전혜린, 천상병 등 당대 문사들의 단골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가난했던 문인들은 은성이 내놓는 넉넉한 대포와 음식에 불안한 심연을 의탁할 수 있었다. 연희동 야식포차 역시 수많은 시인, 작가들의 사랑방으로 더한 것을 바라거나 욕망하지 않고 1년 365일 똑같은 모습을 지켜가고 있다. 말하자면 은성의 21세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