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이준식의 한시 한 수]〈271〉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4일 22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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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에 사는 아리따운 여인, 세상에 다시없이 저 홀로 우뚝하다오.
한 번 돌아보면 성이 무너지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울지요.
성 무너지고 나라 기우는 걸 어찌 모르리오만, 그래도 미녀는 다시 얻기 어렵다오.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미녀의 노래(가인곡·佳人曲)’ 이연년(李延年· ?∼기원전 101년경)


음악가 이연년이 한 무제 앞에서 불렀다는 노래. 미녀가 보내는 눈길 한두 번에 온 성, 온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 세상 어디에 그런 미녀가 있느냐고 황제가 궁금해하자 곁에 있던 누이 평양(平陽) 공주가 지금 노래하는 저 음악가의 누이가 바로 그 미녀라고 귀띔했다. 후일 황제는 이연년의 누이를 황궁으로 불러들여 부인(夫人)으로 책봉하여 총애했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여자의 미모를 최대치로 강조한 건 분명한데 시인이 이런 식으로 제 누이를 빗댄 게 묘하긴 묘하다. 하(夏)의 걸왕(桀王), 은(殷)의 주왕(紂王), 그리고 서주(西周)의 유왕(幽王), 이 망국의 군주들이 각각 말희(妺喜), 달기(妲己), 포사(褒姒)라는 미녀에 취해 망국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게 엄연한 역사의 진실인데도 말이다.

어쨌든 ‘다시 얻기 어려운 미녀’임을 내세우며 나라 기우는 것도 나 몰라라 식으로 치부할 수 있다니 오빠의 배려가 갸륵하다면 갸륵하다. 후일 이 부인은 아들 하나를 남기고 병사했는데 황제가 병문안을 위해 누차 찾아왔지만 자신의 초췌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끝까지 만나 주지 않았다는 일화를 남겼다. 황제도 꺾지 못한 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경국지색#미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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