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우경임]수백 채 빌라 굴리며 정부 보증금 떼먹는 악성 임대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5일 23시 21분



‘빌라왕’ 60대 사모 씨가 전국에 보유한 주택은 718채, 전세보증금은 1874억 원이다. 채당 2억6000만 원꼴이다. 사 씨는 ‘동시 계약 진행’이란 악질적 전세사기 수법을 썼다. 공인중개사 등과 짜고 전셋값을 부풀려 매매가와 똑같이 맞춘 뒤 같은 날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으로 그 집을 사는 방식이다. 집주인으로는 명의만 빌려온 가짜를 내세웠다. 이 집을 담보로 대출받아 가짜 집주인은 파산시키고, 돈은 다른 데 써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세입자는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없게 된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올해 4월까지 약 7년간 사 씨를 대신해 세입자에게 돌려준 보증금이 546억 원인데, 경매를 통해 회수한 건 2억 원에 불과하다. 더욱이 사 씨 보유 주택 중 전세 만기가 안 된 주택이 200채가 넘고, 보증금도 557억 원 남아 있다. 수사 중인 사 씨가 제때 보증금을 돌려줄 리 없으니 HUG가 변제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범죄 수익을 HUG와 피해자가 나눠서 부담하는 셈이다.

▷사 씨 같은 악성 임대인이 늘면서 HUG가 대신 변제한 금액은 3조 원에 가까워졌다. 회수된 금액은 10%에도 못 미친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 보증금 반환 보증을 서는 HUG 모두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줄 능력이 있는지 따지지 않는 게 전세자금 대출의 구조적 허점이다. 악성 임대인들이 이 틈새를 파고들어 세입자에게 전세대출을 권유하며 수백 채씩 ‘갭 투자’를 벌였다. 정부가 사실상 전세사기를 방조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사회적 재난’이 된 전세사기에 대응해 정부는 악성 임대인 명단을 공개한다. HUG가 보증금을 대신 갚아준 주택이 3건 이상인 임대인 가운데 상환 의지 등을 고려해 지정한다. 문제는 심의를 거쳐 공개하는 데 수개월이 걸리고, 그사이 애꿎은 피해자가 계속 발생한다는 점이다. 4월 기준으로 악성 임대인 664명이 공개됐는데 이 중 HUG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거나 형사 고소·고발을 한 악성 임대인은 42명뿐이다.

▷‘주택도시기금’은 국민들이 집을 살 때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국민주택채권, 내 집 마련을 위해 붓는 청약저축 등으로 조성된 자금이다. 원래 임대주택을 짓거나 낮은 금리로 서민들에게 주택 구입, 전월세 자금을 지원하는 데 써야 할 돈인데 ‘빌라왕’ 같은 악성 임대인이 떼어먹은 돈을 갚는 데 뭉텅이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세사기를 당한 세입자는 피해자로 인정받는 절차가 까다롭고, 구제 방안도 대출 지원 중심이어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이쯤 되면 대체 누가 정부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악성 임대인#빌라왕#주택도시보증공사#hug#전세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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