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갤러리에서 한창 잘나가던 34세의 젊은 미술가 앤디 워홀(1928∼1987·사진)의 첫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갤러리에는 미국인들이 즐겨 먹던 캠벨사의 수프 통조림 수십 개를 그린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당시 대중들에게 충격을 준 이 ‘캠벨 수프 통조림’ 전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물건을 활용해 현대사회의 대량생산 및 복제 개념을 미술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평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팝아트’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로도 꼽히는 워홀은 1949년 카네기공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뉴욕으로 건너갑니다. 그는 잡지 삽화 및 광고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1952년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아트 디렉터스 클럽상을 수상할 정도로 두각을 드러냅니다. 이후 그는 전업 예술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워홀에게는 늘 ‘예술을 팔아 돈을 벌려 한다’는 세간의 비난과 공격이 따라다녔습니다. 당대 예술계에선 실크 스크린을 이용한 대량 복제, 예술 노동자를 고용해 이뤄지는 그의 작업 방식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워홀은 예술이란 많은 이들이 보고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작품도 일반 소모품처럼 대량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워홀이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을 뜻하는 ‘팩토리’로 불렀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예술과 회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급진적으로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캠벨 수프 통조림’ 전시가 불러일으킨 수많은 논란과 비판을 겪은 워홀은 다시 ‘죽음과 재난’ 시리즈를 제작합니다. 당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와 사건들, 죽음을 주제로 한 이 시리즈에서 워홀은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고수하며 새로운 예술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또 코카콜라, 엘비스 프레슬리, 매릴린 먼로 등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스타 및 상품 이미지를 모티브로 20세기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습니다.
1987년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워홀과 그의 작품은 미디어 어디에나 등장할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살아서 전설이 됐다는 말을 듣는 워홀은 어쩌면 예술이 상업화, 대중화되는 시대에 예술가의 브랜드 가치를 발견한 첫 번째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