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치러진 영국 하원의원 선거에서 보수당이 역사적인 참패를 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압도적 당 지지율 열세 속에서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결과를 뒤집지는 못했다.
영국 보수당은 ‘옛것을 지킨다’를 신조로 하는 정당이지만 산업혁명, 세계대전, 냉전, 정보화 혁명 등 대격변기 속에서도 300년을 존속해 왔다.
영국 유학 시절 ‘영국의 보수 정당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굳건히 주도적 정당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 주요 연구 주제이기도 했다. 결론은 보수당의 ‘변화 DNA’였다. 보수의 근본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한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왔다. 이념에 함몰되지 않고 필요한 과제를 이행한다는 점을 인정받아 왔다.
‘정당의 생명력’을 쓴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와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의 저자인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가 공통적으로 꼽은 영국 보수당의 성공 비결도 ‘사회 변화에 대한 유연함’이다. 보수당은 ‘오래된 정당(Old Dog)’이지만 새로운 변화에 수용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보수당은 처음에 귀족과 지주의 연합으로 출발했지만 참정권 확대를 수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총선에서 참패한 후에는 좌파의 복지국가 노선을 받아들였고, 국민보건서비스(NHS) 설립을 수용했다. 1990년대 제3의 길을 부르짖었던 토니 블레어에게 정권을 내준 뒤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분배, 환경 등 진보적 의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의 요구를 받아 변화하고 수용하는 데 연이어 실패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브렉시트,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중대한 도전이 있었지만 보수당은 무기력과 무능, 내부 분열만을 노출했다.
반면 영국 노동당수인 키어 스타머는 좌파임에도 핵 억지력을 강조한다거나 증세 논쟁에서 유연한 모습을 보이며 올해 치러진 지방선거와 총선을 모두 압승으로 이끌었다.
유권자의 지지 상실과 당내 분열은 한국의 보수 정당도 똑같이 겪고 있는 난맥상이다. 우리의 해답도 결국은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 사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양극화다. 2021년 기준 상위 0.1%의 종합소득은 약 300조 원으로 전체의 10%를 넘게 차지한다. 상위 1%의 소득 점유율은 24%이다. 한국의 소득 불평등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넘어섰다. 올해 초 한 여론조사에서 20, 30대 청년 응답자 중 73%가 한국 사회를 ‘패자 부활이 불가능한 사회’라 느낀다고 답했다.
국민의힘은 여전히 변화를 거부하는 정당, 부자를 위한 정당, 영남 정당의 이미지가 강하다. 미래 비전을 내놓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커녕 내부 갈등과 투쟁만 지속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양극화로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포용사회 지향, 즉 약자와의 동행이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는 약자와의 동행이야말로 국민의힘 집권 플랜이기에 앞서 대한민국 번영 플랜이라고 본다.
약자와의 동행 중에서도 국민의힘이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정책은 안심소득 같은 사회 안전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계적 경제학자들과 정책 실험에 돌입한 지 2년을 맞은 안심소득은 기준점 이하의 소득과 재산을 가진 분들을 하후상박(下厚上薄)형으로 지원한다. 양극화로 벌어진 사회적 간극을 메워주면서도 재정 안정성을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됐다. 기존 복지와 달리 직업이 생겨도 일정 소득까지는 지급액을 유지해 노동 의욕을 권장한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 살포하는 이재명 전 대표의 기본소득과는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정치는 변해야 살 수 있다. 양극화를 이길 포용력을 보여주는 정당이 확장할 수 있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서민에게 귀를 기울이는 따뜻한 정당, 약자들이 힘들어하는 일들을 먼저 풀어주는 유능함으로 보수의 길을 다시 열어야 한다. 변화하는 시대 요구에 귀 기울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보수 재건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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