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나토 정상회의 떠돈 ‘트럼프의 유령’
‘바이든 이후’ 준비한다지만 동맹은 무기력
넉 달 뒤로 예고된 푸틴-김정은과의 직거래
이분법 외교 벗어나 ‘서방의 위기’ 대비해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워싱턴 정상회의에서 이런저런 선물들을 챙겼다. 60조 원 규모의 나토 군사지원 약속, 패트리엇 등 방공무기와 F-16 전투기 추가 인도, 20여 개국과의 양자 안보협정까지. 하지만 가장 절박한 문제에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푸틴 대통령’이라 소개받고 머쓱해야 했던 수모는 젤렌스키가 느낀 좌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올해도 나토 가입을 위한 구체적 일정표를 받아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나토에 있다’는 작년의 공동성명에 ‘회원국으로 가는 다리(bridge)’ ‘되돌릴 수 없는(irreversible) 경로’라는 문구가 추가됐지만 여전히 공허한 수사일 뿐이다. 동맹으로서 집단방위의 보호를 받는 나토 회원국 지위는 요원하고 오히려 러시아 침략의 구실이 된 ‘잠재적 회원국’이란 불안정한 처지만 재확인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당장 절실한 군사 현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젤렌스키는 서방이 각종 무기를 지원하면서 내건 제한 사항들, 즉 그 무기들로 러시아 영토 깊숙이 타격해선 안 된다는 조건의 해제를 강하게 요구했다. 러시아는 자국 영토로부터 전방위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데,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내 공격 원점을 때리지 못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꿔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서방 국가들은 난색을 표했다. 누구보다 바이든이 완강했다. 그는 “만약 그(젤렌스키)가 모스크바를, 크렘린을 타격할 능력을 갖는다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아닐 것이다”고 거부했다.
이런 엄격한 무기 사용 제한은 우크라이나 지원과 확전 방지 사이의 딜레마, 즉 우크라이나를 최대한 지원하되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은 피해야 한다는 미국의 우려에서 비롯됐다. 바이든은 핵 가진 강대국 간 정면 대결이 부를 거대한 재앙을 걱정하며 매우 신중한 지원책으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왔다. 그는 주변에 “젤렌스키가 우리를 제3차 세계대전으로 끌어가려 한다”고 토로하기도 했다.(데이비드 싱어 ‘새로운 냉전들’)
미국은 무기 지원의 수준도 천천히 조금씩 끌어올리는 이른바 ‘개구리 삶기’ 방식을 고수했다. 대전차미사일부터 대공미사일, 고속기동포병로켓(HIMARS), F-16 전투기, 전술지대지미사일(ATACMS)에 이르기까지 조심스럽게 고성능 장거리로 높여가며 러시아가 선을 넘지 않도록 관리했다. 거기에 ‘국경 넘어 사용 금지’ 조건을 붙였으니, 패배는 피하겠지만 승리는 불가능한, 즉 생존만 보장하는 수준 아니냐고 우크라이나가 반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분통을 터뜨리기엔 정작 나토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이번 정상회의를 지배한 것은 ‘트럼프의 유령’, 즉 11월 도널드 트럼프의 복귀가 불러올 공포감이었다. 노쇠한 바이든의 인지능력에 대한 언론의 질문 공세에 시달린 유럽 정상들은 그 누구보다 불길한 예감 속에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사실 유럽의 문턱에서 벌어진 전쟁에 맞서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바이든 덕분인데, 그가 없는 나토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트럼프의 피격 소식. 피를 흘리면서도 주먹을 치켜세워 “싸우자!”고 외치는 트럼프를 보며 유럽 지도자들은 더욱 오싹했을 수 있다. 나토가 나름대로 트럼프 복귀에도 끄떡없는(Trump-proof) 대비 장치를 마련했다지만, 앞으로 트럼프가 얼마나 세계를 흔들어 놓을지 그 충격과 혼란의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젤렌스키로선 원치 않는 휴전협상에 끌려 나갈 미래를 상상하며 경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나토 회의에는 윤석열 대통령도 아태 파트너 4개국(IP4)의 일원으로 3년 연속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서방 자유진영과의 연대, 북핵에 맞선 한미동맹의 확장억제 의지를 과시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트럼프가 복귀하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특히 트럼프가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김정은과 벌일 위험한 직거래는 우리에겐 동맹의 위기로 다가올 것이다.
윤 대통령은 그런 서늘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느끼고 돌아왔을까. 북-러의 동맹 부활에 한미 동맹 결속으로 맞서면서 한때 관리 모드에 들어갔던 한-러 간엔 다시 가시 돋친 언사가 오간다. 우리 외교에 동맹, 나아가 서방과의 동행은 필수다. 하지만 한쪽에 묶인 채 협력과 적대를 가르는 이분법적 외교로는, 몇 달 뒤를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외교로는 닥쳐올 혼돈을 헤쳐 나갈 수 없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대비하는 유연하고 정교한 전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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