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에 밀리던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이에 맞서 자국 공관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파병한 병력이었다. 명목은 그러했지만 청군의 파병 병력을 파악한 뒤에 그보다 많은 병력을 보냈다. 이들은 처음부터 청과 전쟁을 벌일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군에 되돌아가 줄 것을 청했고, 청의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같이 철군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 후에도 계속 증원되었다. 그러면서 청에는 조선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청이 그런 제안을 받을 리가 없었다. 7월 19일 일본은 청과 전쟁을 결정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앞서 배후의 위협이 될 조선을 정리하고자 했다.
7월 20일 일본은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청과 절연하고 일본군의 조선 주둔을 허락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 정부에 청나라 군대가 속방(屬邦)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주둔한 것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이 독립국이라면 청군에게 나가라고 요청해야 한다”고 압박을 가했다. 만일 청군을 몰아낼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일본군이 대신 몰아내 주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다.
일본은 조선의 답변이 불만족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경복궁 점령 작전을 진행했다. 각 부대가 한양 사대문을 점거하고 경복궁의 출입문들을 습격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일본군은 23일 0시 30분, 전신선을 끊는 것으로 점령 작전을 개시했다. 청에 연락이 가지 못하게 전신선을 끊은 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4시 20분 경복궁 건춘문에 도착했다. 우리 수비병이 발포하자 응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다른 부대는 반대편의 영추문을 부수고 진입을 시도했다. 영추문으로 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수비병들은 협공을 당했으나 오전 7시 30분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일본군은 고종을 찾아 왕궁을 수색했다. 오전 9시경 고종을 체포하고 협박하여 수비군의 저항을 끝내도록 했다. 그럼에도 경복궁에서 총격전은 오후 2시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은 이 침탈이 갑자기 조선군이 발포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거짓말 이다. 대외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 청나라와 싸우기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이웃 국가 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한 의로운 전쟁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철저 히 언론을 통제했기 때문에 이 진상을 아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일본의 국민 작가인 시바 료타 로는 메이지 유신부터 러일전쟁까지를 다룬 베스트셀러 ‘언덕 위의 구름’에서 경복궁 침탈 사건에 대해서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은 8월 1일 칙령 134호를 내려 언론을 사전 검열했다. 이 런 언로 봉쇄가 결국은 군국주의 일본을 낳게 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으로 이끈 것이다.
경복궁 침탈과 청일전쟁의 진짜 의도를 감추려했던 일본의 속임수는 역사학자들의 추적에 의해 결국 탄로 나고 말았다. 국가의 일이라 하여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진실은 때로 감당하기 힘들 수 있지만 결국 그 길만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을 역사는 언제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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