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에 찔린 듯한 상처를 입은 남자가 나무에 기댄 채 피를 흘리고 있다. 얼굴에는 고통과 슬픔이 서려 있다. 하얀 셔츠는 가슴 쪽에서 뿜어 나오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한 손으로는 망토를 붙잡고 있지만 그가 살아날 가망은 없어 보인다. 그는 왜 다친 걸까?
‘부상당한 남자’(1844∼1854·사진)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25세 때 처음 그린 자화상이다. 그를 다치게 한 건 다름 아닌 화면 왼쪽에 놓인 자신의 칼이다. 칼의 손잡이 모양은 뒤집어진 C자 형태로 이는 쿠르베(Courbet) 이름의 첫 글자를 의미한다. 상처 입은 그의 표정과 모습은 화살과 곤봉을 맞아 순교한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도상을 참조했다. 그러니까 화가는 자신을 순교 성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에게는 붓이 무기고 칼이다. 핏자국은 물감이다. 망토를 움켜쥔 손 모양은 마치 팔레트를 잡은 것과 흡사하다. 쿠르베는 지금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의 붓(그림)에 상처 입고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다친 남자의 머리와 상체는 잎이 무성한 나무에 기대어 있다. 나무는 생명을 상징하기에 다시 살아날 수도 있을 테다.
원래 그림에서는 그의 어깨에 기댄 여자를 한 팔로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낳은 버지니 비네를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10년쯤 지난 후 쿠르베는 그림에서 여자를 지워버렸다. 그 대신 칼과 붉은 핏자국을 그려 넣었다. 비네와의 오랜 관계를 끝내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표현한 것이었다. 여인을 지우고 칼을 추가했다는 건, 사랑보다 예술을 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못난 면과 잘난 면이 있다. 쿠르베는 화가로 성공하지 못하고 사랑에도 실패한 자신을 스스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터. 어쩌면 이 자화상은 못난 과거를 잊고 혁신적인 예술을 통해 낭만적이면서도 영웅적인 남자로 거듭나고픈 욕망을 담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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