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파란 여름날의 반찬 배달 봉사[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21일 2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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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독거 어르신 밑반찬 배달 및 말벗 봉사.’ 신청을 하긴 했는데 막상 가려니 때아닌 긴장감이 밀려왔다.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일찌감치 지정된 장소에 도착해 근처 카페에 머물렀다. “옆에 차 대도 되나요?” 한 여자가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통유리로 된 작은 카페라 바깥 사정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옆 좁은 주차 칸에서 한 남자가 분투하고 있었다. 결국 차를 긁었는지, 앳된 커플은 나란히 쪼그려 앉아 한참을 엄숙하게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들어오며 남자가 멋쩍은 듯 말했다. “수업료야 수업료. 원랜 잘하는데.” 테이블 간격이 좁다 보니 본의 아니게 대화까지 듣게 됐다. 별것 아닌 이야기로 꺄르르 웃는 그들이 새삼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내된 건물로 들어섰다. 10대 친구들이 무리를 지어 누가 누구랑 다퉈서 학원을 옮겼다는 이야기를 세상 심각한 얼굴로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에는 자주 오는 것으로 추정되는 내 또래 몇이 쭈뼛대는 나와 달리 익숙한 듯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주소와 이름이 적힌 아이스박스 수십 개가 죽 늘어서 있었다. “처음 오셨어요?” 책임자로 보이는 이가 묻더니 대뜸 몇 개를 내 앞으로 배정했다. 활동의 배경이나 취지 같은 거창한 오리엔테이션을 기대했던 스스로가 머쓱해졌다. “여기서부터 이 순서대로 가면 편할 거예요. 지난주 반찬통도 꼭 수거해 오셔야 해요!” ‘배달’을 위해 알아야 할 것은 그게 전부였다.

날은 더웠고, 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주소 뒤에 ‘어디 차고 뒤’ ‘어디 안’과 같은 사족이 많아 의아했는데 한두 집을 돌다 보니 납득이 갔다. 주소지를 찾아와서도 한참을 묻고 물어야 했다. 명색이 ‘말벗 봉사’인지라 처음엔 벨을 눌렀다. 문을 열면 방 안의 단출한 살림살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문 앞에 뒀는데요.” 비대면을 선호하신다는 것을 그 표정에서 깨달았다. 독거 어르신이라고 마냥 낯선 타인의 방문을 반길 것이라 생각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이후부터는 보물찾기하듯 찾은 문 앞에 검은색 비닐봉지가 걸려 있으면 쾌재를 불렀다. 지난주 반찬통을 수거하고 새 반찬을 두었다. “어르신, 문 앞에 반찬 두고 갑니다!” 현관문 위에 난 창으로 센서등이 켜지는 게 보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지막 집, 빌라 사이를 헤매는데 커다란 종량제 봉투 앞에서 옷가지를 정리 중이던 어르신이 내 손에 들린 반찬통을 흘긋 보더니 말씀하셨다. “문 앞에 있어요.” “네, 새 찬들 문 앞에 둘게요!” 빈 통을 수거하고 내려오는 길, 어르신은 봉투를 옮기며 씨름하고 계셨다. “제가 할게요!” 외치며 달려갔더니, “괜찮아요. 여기 그냥 이렇게 둘 거라”라며 그제야 환히 웃어 보이셨다. “네, 어르신. 건강하세요!” 덩달아 활짝 웃음 지었다. ‘또 올게요’ 한마디를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가벼워진 보따리를 이고 돌아오는 길, 눈길조차 주지 못한 사이 거리엔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학생들의 꺄르르 웃음소리가 초여름 볕으로 이글거리는 거리를 메웠다. 유난히 파란 날이었다.
#반찬#배달#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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