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환율을 다루는 3가지 방식이 있다며 흥미로운 관점을 소개했다. ‘환율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주요 7개국(G7) 방식,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해 환율 개입에 적극 나서는 개발도상국 방식, 겉으로는 ‘환율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제론 환율만 생각하는 일본 방식이 그것이다. 세계 5대 내수시장(미국, 유럽, 중국, 인도, 일본)임에도 환율에 휘둘리는 일본 경제 체질을 꼬집는 지적이었다.
환율만 바라보는 日 경제정책
일본 경제정책이 ‘기승전 환율’이 된 건 39년 전 일본이 겪은 ‘플라자합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다. 1985년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은 각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리기로 한 플라자합의를 체결했다. 합의 후 환율 절상(엔-달러 환율 하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맞이했다.
1985년 달러당 235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1년 만에 120엔대까지 떨어졌다. 일본의 수출 경쟁력은 환율과 함께 추락했다. 경기 불안에 일본 당국은 ‘돈 풀기’를 택했다. 1985년 연 7%대였던 장기 금리를 2년 뒤 4%대까지 내렸고 부동산 대출 규제는 완화했다. 인위적으로 가치가 오른 통화가 시장에 대거 풀리니 거품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1989년 미쓰비시의 맨해튼 록펠러 센터 매입은 거품경제의 절정이었다. 이후엔 거꾸로 강한 대출 규제에 나섰다.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은행, 증권사는 도산했다.
2010년대 일본 경제 회생을 목표로 펼쳤던 아베노믹스 양적완화도 결국 ‘기승전 환율’ 정책이었다. ‘윤전기를 돌려’ 찍은 엔화로 2012년대 80엔대였던 엔-달러 환율은 2015년 120엔대까지 올랐다. 지금도 이어지는 엔저로 엔화 환율은 160엔대를 오간다. 도쿄 긴자, 오사카 도톤보리가 엔저를 즐기는 한국인으로 채워지고 도요타 등 수출 기업이 잘나가면서 일본 정부가 기대한 긍정적 효과는 일부 나타나고 있다. 30여 년간 오르지 않던 물가가 불안해져 일본 국민들의 불만이 크지만 일본 당국은 엔저를 급격히 변화시킬 의지도, 여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큰 통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들은 항상 약세를 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이 발언을 일본은 불안하게 바라본다. 10년 넘게 펼친 양적완화로 이제 겨우 외국인이 쓰는 달러를 만지고 수출 경쟁력을 높였는데, 미국의 ‘팔 비틀기’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물가 불만을 달래려 엔저 정책을 뒤집었다가 겨우 살아나는 경기 불씨를 꺼뜨릴까 봐 걱정이 크다. 그렇다고 엔저에 손을 대려는 트럼프와 맞설 용기는 없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환율로 경제 운명이 갈릴 일본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플라자합의 3저 호황 재연 어려워
39년 전 플라자합의는 한국에 3저(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호황을 가져왔다. 이후 미일 반도체 협정, 중국 시장 개방, 기업들의 기술력 향상으로 오늘날 선진국 문턱에 진입했다.
트럼프가 내세울 강달러 시정이 ‘제2 플라자합의’가 된다면 우리는 그때처럼 수혜를 볼 수 있을까. 39년 전 한국은 강대국 고래 싸움의 틈새에서 살아남는 전략을 펼쳤다. 이제는 외부에서 걸어오는 싸움을 피해 가기엔 덩치가 너무 커버렸다. 한국을 일본, 중국과 하나로 묶어 ‘미국 제조업을 침공하는 나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 일본, 중국은 내수로 버틴다지만 우리에겐 그런 시장도 없다. 폭풍우는 다가오는데 해법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와 고민은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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