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아들, 갓 결혼한 신랑, 갓난아기를 안아 든 초보 아빠, 전쟁은 이런 사람들을 전선으로 호출한다. 그리고 이들 일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자식이나 남편을 잃은 어머니가 강인하게 살아가고,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아기가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가족의 불행을 극복하고, 아무리 탁월한 삶을 성취한 사람이라도 삶에 파인 자국을 지울 수는 없다.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미국 학계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냉전체제가 빚어낸 비극이라는 시각과 광복 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갈등해 온 이념 대립이 빚어낸 내전이라는 해석이다. 후자를 수정주의라고 하는데, 남의 나라 전쟁에 애꿎은 미국 청년들이 희생되었다는 감정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유가족의 고통과 남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을 생각하면 “왜 우리가 다른 나라의 전쟁에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가?”라는 수정주의적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아니, 그런 감정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수정주의는 절반의 진실이다. 현대 세계는 국내적 현상과 국제적 현상이 흙과 물을 나누듯이 구분되지 않는다. 식물은 그 땅의 흙에서 자라지만, 비는 지구를 도는 대기의 산물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원리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약진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수정주의적 감성도 약진하고 세계가 동요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절반의 진실이란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당선된다고 해도 그의 말 역시 10%의 진실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선동이 트럼프의 전유물은 아니다. 수정주의적 감성이 미국인만의 이기주의나 피해의식도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이성도 똑같은 시험대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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