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유재동]힐빌리는 우리 주변 어디나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7월 24일 23시 15분


유재동 경제부장
유재동 경제부장

미국 러스트벨트의 백인 저소득층을 뜻하는 멸칭(蔑稱) 하나가 JD 밴스의 공화당 부통령 후보 지명을 계기로 다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밴스의 베스트셀러 회고록에 소개된 힐빌리(Hillbilly)의 삶은 미국 현지에서도 2016년 출간 직후 상당한 화제가 됐다. 가난과 폭력, 알코올중독, 마약에 찌든 이들의 영혼은 ‘열심히 살아봤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학습된 무기력이 지배한다. 고된 생업에 지친 부모들은 점심은 KFC, 저녁은 맥도널드로 자녀의 끼니를 아무렇게나 때운다. 마을에는 고등학교 중퇴자가 넘쳐 나고, 설탕 음료를 하도 마셔대서 이빨이 모두 썩어나가는 ‘마운틴듀 입’(Mountain Dew Mouth)을 가진 아이들투성이다.


급변하는 경제 환경의 피해자들

힐빌리의 스토리는 여느 국가의 평범한 빈곤층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필자는 2020년 미 대선 당시 특파원을 하면서 도널드 트럼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이런 ‘촌 동네’ 백인들을 많이 만나 봤다. 이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공통된 것은 “우리가 원래는 잘살았다. 그런데 외부 세력이 들어오고 나서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는 논리였다. 밴스는 책에서 글로벌 기업의 침투로 마을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경험을 담담하게 기술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확산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밑바닥까지 밀려난 사람들, 그게 바로 힐빌리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달라진 경제 환경의 급류에 휩쓸려 계층 하락의 피해를 보는 ‘한국판 힐빌리’는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에 무리한 대출로 집을 샀다가 고금리 장기화라는 철퇴를 맞은 영끌족들, 부모 세대는 경험해 보지 못한 저성장과 구직난에 비자발적 백수로 지내는 청년 실업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최저임금 급등과 내수 침체에 줄폐업하는 자영업자, 인공지능(AI)에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수많은 지식 노동자들도 마찬가지 신세다. 물론 세상이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뒤처지고 도태되는 집단은 인류 역사에 언제나 있어 왔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변화와 추락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실업 청년, 영끌족 아픔 보듬어야

미국 경제의 중추에서 순식간에 하층(下層)으로 전락한 힐빌리에게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정치 세력이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워싱턴 정가가 여야 모두 기득권 세력만 구애하는 각축장으로 변했을 때, 그 빈 공간을 영민하게 꿰차고 들어온 것이 정치 신인 트럼프와 밴스다.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자산 격차가 고착화되며 기회의 사다리가 붕괴되는 동안, 여의도 정치인들은 소수의 극렬 지지층과 거대 이익집단만 바라보며 정작 서민의 삶을 외면했다. 진보다 보수다 실용이다 온갖 고상한 용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장했지만, 삶이 절박한 이들에겐 먹고사는 것을 제외한 모든 말들은 그저 딴세상 얘기일 뿐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노력만 하면 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비율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정치 지형과 사회 여건이 미국과 여러모로 다른 한국에선 영끌족이나 청년 구직자,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미국처럼 정치 세력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힐빌리를 ‘미국판 태극기 부대’쯤으로 보고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현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우리 주변 흙수저들, ‘한국판 힐빌리’의 현실이 너무나 녹록지 않다. 소외 계층의 분노와 아픔을 제때 감싸안지 못한 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지난 몇 년간 미국은 뼈저리게 경험했다. 거기서 우리가 깨닫는 게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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