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 위 맑은 유리컵에 담긴 물이 자꾸 먹고 싶어 입을 벌리다가 나는 내 육신이 불쌍해졌다 주인을 잘못 만나 이 무슨 고생인가 나는 내 육신에게 진정 사과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채봉(1946∼2001)
첫아기를 낳았을 때, 세상 모든 아기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한 소년의 엄마가 되고부터는 오가는 소년들이 다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한 소년을 깊이 사랑하게 된 탓에, 정채봉의 시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정채봉의 모든 작품 속에는 말간 얼굴의 소년이 들어 있다. 사랑받아 마땅했던 소년이 외롭고 고달파서 울고 있기도 하다. 그가 어른이 되어 쓴 동화를 읽어도 소년이 보이고, 그가 어른이 되어 쓴 시를 읽어도 소년이 보인다. 소년은 인생의 한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한 유형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정채봉을 통해 알게 된다. 착하게 살려고 하는, 반듯하게 자라려고 하는 그 멋진 마음이 소년이다.
그랬던 시인이 아팠다. 간암이라고 했다. 많이 아파서 중환자실에 있었나 보다.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그곳에서 시인은 사과를 한다. 미안하다. 주인을 잘못 만난 몸아, 피야, 장기야 미안하다. 저 좀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런 말이 먼저일 줄 알았는데 몸에게 사과를 한다. 이 소년이 가여워서 마음이 아프다. 너무 깨끗해서 마음이 아프다. 나의 소년을 꼭 안아주면서 다른 모든 소년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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