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청사에는 순직한 요원들을 기리는 ‘이름 없는 별’ 조형물이 있다. 2018년 7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정원 방문을 계기로 조성됐다. 당시엔 별이 18개였으나 지금은 19개로 늘었다. 조형물 밑에는 “소리 없이 별로 남은 그대들의 길을 좇아 조국을 지키는 데 헌신하리라”는 직원들의 각오가 새겨져 있다. 문 전 대통령은 국정원 방문 시마다 그 앞에서 묵념했고, 윤석열 대통령도 그 전통을 이어갔다.
한때 인사 소동으로 떠들썩하다가 조태용 원장 부임 이후 안정을 찾아가던 국정원이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첫 번째 도화선은 더불어민주당이 붙였다. 2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안보범죄에 관한 국정원의 조사권 폐지’와 ‘국정원 내 정치관여 행위를 신고하는 신고자를 공익신고자로 지정’ 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정원법 개정 추진에 나선 것이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에서 단행된 ‘국내보안정보부서 폐지’와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에 이은 국정원 무력화 시도라는 논란 등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그다음은 의외로 혈맹국인 미국에서 터져 나왔다. 미 연방 검찰이 한국계 중앙정보국(CIA) 출신 수미 테리를 국정원 해외 파견 요원과 부적절한 접촉을 했다며 ‘외국대리인등록법’을 적용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들 두고 국정원 요원들의 치밀하지 못한 정보활동이 도마에 올랐고, 대통령실까지 개입하면서 지난 정부의 잘못이니 이번 정부도 잘한 게 없다느니 하며 여야 간 정쟁으로 비화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 직원들은 익명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국정원법에는 원장과 차장, 그리고 기조실장 직위만 공개돼 있다. 인원, 조직, 예산, 소재지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정보기관의 불문율이다. 그만큼 비밀스럽고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죽어서조차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19명의 ‘이름 없는 별’ 중 신상이 공개된 인물은 1996년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피살된 최덕근 영사가 유일하다.
세계 외교계의 거목인 고 헨리 키신저 박사는 “우호적인 국가는 있어도 우호적인 정보기관은 없다”고 갈파했다. 첩보의 세계가 그만큼 비정함을 웅변하고 있다. 오늘날 정보활동의 대상에는 동맹국을 포함한 모든 외국은 물론이고 테러단체 등 비국가 행위자에 이르기까지 확대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호전적인 북한과 치열한 정보전쟁을 해야 하는 이중삼중의 부담을 안고 있다.
영국 비밀정보부인 MI6 출신이자 스파이 소설가로 유명한 존 러카레이는 스파이를 ‘지정학적 연금술사’라고 지칭했다. 이는 스파이 활동이 국제관계의 지정학을 바꿀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것은 우리 국민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이지만, 숨 막히는 정보전쟁에서 오로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정보요원들의 숨은 역할이 있었음도 기억해야 한다.
국정원이 수미 테리 파문을 계기로 인적 쇄신과 함께 조직 기강을 바로 세우려 한다는 소식이 있는데 정말 제대로 하길 바란다. 하지만 국가 정보기관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명하복이 생명인 정보기관에 내부고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겠다는 식의 접근은 더더욱 곤란하다.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더 이상 ‘이름 없는 별’들을 욕되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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