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당 가기 무섭습니다.” 지역에 사는 어르신들의 하소연이다. 경로당 노인들이 농약에 중독돼 쓰러진 사건이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5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에서 65∼78세 할머니 4명은 오리고기를 먹은 후 경로당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미리 큰 통에 타둔 믹스커피를 냉장고에서 꺼내 마신 후 심정지, 마비 등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농약 중독이었다. 3일 후 또 다른 H 할머니(85)가 유사한 증세로 중태에 빠졌다. 그는 앞서 입원한 할머니 4명과 오리고기를 함께 먹었지만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농약 복용 시 증상이 바로 나타나는데, 이 할머니만 3일 후 중독 증상을 보인 것. 먼저 쓰러진 할머니 4명은 위세척 결과 에토펜프록스, 터부포스 등의 농약 성분이 나온 반면 H 할머니에게서는 이와 다른 농약 성분이 검출됐다. H 할머니는 지난달 30일 숨을 거뒀다.
경찰, 사망 할머니 경로당 갈등 수사
경찰은 피해자로 보이는 H 할머니를 용의선상에 두고 수사하고 있다. 그의 자택을 최근 수색했고, 쓰러지기 전 자신의 통장에 있던 돈을 찾아 가족에게 보낸 사실도 확인했다. H 할머니 외의 할머니 4명은 경로당 간부였으며, 이들이 공용 식품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경로당 내 다른 어르신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진술도 확인 중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증거물 감정 결과가 나오면 사건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봉화 농약 사건을 취재하면서 접한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사건 이면에 고령화에 따른 노인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 관계자는 “노인 시설에서 함께 생활하는 고령자가 늘면서 각종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했다. 국내 65세 이상은 960만9000명. 전체 인구의 18.6%다. 2015년 6만6292곳이던 경로당, 복지관 등 노인여가복지시설은 지난해 9만3056곳으로 8년 새 40.4%나 증가했다. 이들 시설의 정원은 40만 명에 달한다.
특히 도시보다 시설이 부족하고 인구 감소가 심한 농촌의 경우 노인들이 경로당 등에서 모여 공동 생활을 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하루 8시간, 매달 20일을 복지관에서 지낸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오래 함께 있다 보면 사소한 시비도 최악의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2018년 경북 포항에선 마을 주민들과 갈등을 겪던 68세 여성이 생선탕에 농약을 넣었다.
공동 생활 속 노인 갈등, 관심 가져야
노인 집단 내 세대 갈등도 자주 발생한다. 전북대 연구를 보면 한 경로당에서 입구 의자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신발을 신기 편하도록 80세 이상 노인들이 긴 의자를 설치했는데, 60대 노인들이 “입구가 예쁘지 않다”며 내다 버리려 해 큰 갈등이 생겼다. 노인복지관에 다니는 70대 남성은 “가족, 친구처럼 익숙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사소한 일도 싸움이 된다”고 했다. 또 다른 노인은 “65세 노인과 85세 노인은 완전히 다른데, ‘노인’이란 범주에 한꺼번에 넣고 공동 생활을 하니 다툼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국내 노인시설은 식사 지원 등 개개인 돌봄에 초점을 맞춘다. 시설 노인 전반의 관계를 관리 및 교육해 주는 프로그램은 없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스위덴 등 유럽은 노인시설 속 고령자 커뮤니티가 제대로 구축돼 갈등을 줄일 수 있게 신경 쓴다. 연령에 따라 각각 다른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유엔은 1991년 총회에서 ‘노인을 위한 원칙’을 채택했고, 오늘날 여러 선진국 고령 정책의 근간이 됐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넘어 원만한 관계 등 행복추구권과 존엄성이 침해되지 않아야 한다는 게 골자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도 노인시설 내 커뮤니티가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갈등 관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10년 뒤엔 한국인 3명 중 1명이 노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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