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정민]政爭 도구로 전락한 美대법관 종신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8월 2일 23시 15분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삼권분립, 특히 사법부 독립은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거듭난 주요 원동력으로 꼽힌다. 특히 9명의 연방대법관에게 종신직을 부여해 소신 판결을 보장한 것이 주효했다. 그 뒤에는 자신의 뜻과 달라도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 역대 대통령, 물러날 때를 알고 자진 사퇴한 몇몇 대법관의 현명한 결단도 존재했다.

다만 입맛대로 사법부를 좌우하려는 최근의 전현직 백악관 주인, ‘용퇴(勇退)’를 모르는 대법관이 넘쳐나는 요즘 상황을 보노라면 이 아름다운 전통 또한 수명이 다한 듯하다.

우선 조 바이든 대통령. 대법관 9명 중 6명이 보수 성향인 현 대법원의 인적 구성을 갈아엎겠다며 대법관의 임기를 18년으로 줄이는 법안을 발의할 뜻을 밝혔다.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의 반대로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공론화한 것은 대법원의 낙태권과 소수계 우대정책 폐기,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에게 내려진 잇따른 유리한 판결에 반발하는 진보 성향 유권자를 11월 대선 전에 결집시키려는 목적이 크다.

이 시도는 ‘내로남불’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와 민주당은 진보 법관이 지금보다 많았을 때는 딱히 종신제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래 놓고 대선 석 달 전 건국 후 248년간 유지됐던 제도를 갑자기 바꾸려 들면 누가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까.

트럼프 후보 또한 내로남불이라면 뒤지지 않는다. 2016년 2월 보수 성향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숨지자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을 새 대법관으로 점찍었다. 트럼프 후보는 “임기 마지막 해의 대통령이 웬 종신직 임명이냐”며 결사반대했다. 당시 공화당도 의회 다수당 지위를 앞세워 오바마 전 대통령의 뜻을 꺾었다. 그랬던 트럼프 후보는 퇴임 넉 달 전인 2020년 9월 ‘진보의 아이콘’ 루스 긴즈버그 전 대법관이 숨지자 냉큼 당시 48세의 젊은 보수 대법관 에이미 배럿을 그 자리에 앉혔다.

몇몇 대법관의 처신 또한 볼썽사납다. 9명 중 최선임인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수 차례의 향응, 아내 버지니아의 2020년 대선 결과 부정 논란 등으로 대법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33년간 대법관이었고 여러 구설에 오른 76세 대법관에 굳이 종신을 보장해줘야 하나.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 또한 2020년 대선 불복의 상징 ‘거꾸로 된 성조기’를 자택에 걸어 정치 편향 논란을 일으켰다.

양성 평등 판결 등으로 생전 칭송받았던 긴즈버그 전 대법관 또한 용퇴 시기를 놓쳤다는 비판을 사후에도 받고 있다. 그는 2014년 오바마 전 대통령이 사퇴를 권유하자 거부했다. 진보 진영은 이런 그가 하필 트럼프 행정부 시절 숨지는 바람에 배럿 대법관이 그 자리를 넘겨받았고 대법원의 보수화 또한 가속화했다고 불만이다. 일부는 “바이든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젊은 진보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진보 대법관 셋 중 최연장자인 70세의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지금 사퇴해야 한다”고 외친다.

미국인의 기대 수명이 38세에 불과했던 건국 당시 채택한 대법관 종신제를 시대 변화에 발맞춰 바꾸자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권력자가 이를 정파적 목적으로만 이용하려 들고 대법관 개개인 또한 ‘지혜의 아홉 기둥’에 걸맞게 처신하지 않는다면 임기를 줄인들 무슨 소용일까.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곳이 현 연방대법원인 것 같다.

#미국 대법관#종신제#정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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