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놓고 말하기 창피하지만 학교 때 제일 못한 과목이 체육이었다. 그 시절 체육선생님들은 왜 그리 무섭게만 굴었는지. 중1 때 처음 체육복 입고 운동장에 나선 순간부터 줄 똑바로 못 섰다고 욕설과 체벌 세례를 받은 것이 내가 기억하는 체육시간의 거의 전부다(여학생의 체육에 대한 부정적 태도 형성은 주로 중학교 시절에 이뤄지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체육교사라는 2002년 논문도 발견했다!).
당연히 운동의 의미와 스포츠의 재미를 모르고 살았다. 직접 하는 것은 물론(논설실에서 단체 등산을 가면 나는 산 아래 카페에서 독서하는 척 기다리고 있었다) 남이 하는 걸 보는 것도 안 좋아했다(세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축구다. 장정 스무 명이 공 하나 차겠다고 한 시간 반씩이나 뛰어다니다니^^).
그런데 뒤늦게 올림픽에 빠졌다. 경기는 여전히 잘 모르겠고 경기 기사가 훨씬 재미있다. 우리 선수들이 어쩌면 그리 말도, 행동도 당당하고 시크한지, 어릴 때 선진국 선수한테 느꼈던 그 느낌을 안겨준다. 후진국에 태어나 아직도 후진국 행동거지와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의도-용산 사람들과는 완전딴판이다.
● 선진국 선수답게 “어차피 세계 짱은 나”
대한민국에 여름올림픽 통산 100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반효진이 최연소 국대(국가대표)라는 점도 감동이다. 두 달 후 열일곱 살이 되는 2007년 9월 생 반효진은 “나도 부족하지만 니들도 별 거 아니다” 할 만큼 담대하다. 심지어 사격과녁과 기록이 담긴 노트북엔 이런 쪽지까지 붙여 놨다. ‘어차피 세계 짱은 나다’.
소심한 내가 선수들한테 가장 배우고 싶은 것도 그 자신감이다. 2일 복싱 여자 54kg급 8강전에서 승리해 한국 복싱 최초로 올림픽 동메달을 확보한 임애지 선수. 지난 도쿄 올림픽에선 1승도 못해 복싱을 그만두려고 했는데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둔 비결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번에는 성적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면 이번 올림픽에선 성적 압박에서 벗어나 도전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됐다는 거다.
당당해서 세계를 사로잡은 매력으로는 사격 김예지를 따라갈 수 없다. 사격 공기권총 10m 여자 결선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김예지. 다섯 살짜리 딸의 엄마이기도 한 그의 시크한 매력엔 나도 쏙 빠질 정도다. 검은 안경, 검은 모자, 검은 옷차림으로 무심한 듯 태연하게 탕, 총을 한 방 쏘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총구를 정리하는 모습은 크, 액션영화 속 여주인공보다 멋지다. 뉴욕타임스가 1일 “파리올림픽에서 가장 쿨한 선수”라고 소개했다는데 참내, 언제 우리 선수가 이런 소리를 들어봤나 싶어 내가 다 자랑스럽다.
● 대통령 비판이 ‘국민 스포츠’ 여서야
너무 촌스러운가.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메달 많이 따와 대한민국 국위를 선양해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젊은 그대들은 경기와 경쟁을 즐기며 한껏 실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금메달 5개, 종합 순위 20위 이내 진입’으로 소박하게 목표를 잡은 것도 아주 잘했다고 생각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 않던가(덴마크 행복지수가 높은 것도 기대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선수들이 고마운 건 지금 우리에게 자부심을 안겨주는 그 무엇이 절실해서다. ‘국뽕’이어도 할 수 없다. 지지고 볶기만 하는 국회, 지지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정치권, 대통령이 나서기만 하면 망가지는 국정, 국민 스포츠가 돼버린 대통령 부부 비판…. 젊은 선수들은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세금으로 월급 받는 저들은 어찌 저리 자기네 이익만 꾀하는지, 왜 이리 나라는 거꾸로만 가는지 무덥고 답답하다.
‘공정과 상식’이 목마른 지금, 양궁은 공정한 선발로 여자 양궁 10연패를 안겨주었다. “한국 양궁엔 금수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인맥, 학맥, 같은 팀, 국대(국가대표) 전력 안 따지고 오로지 점수로만 국대를 뽑았다. 우리나라에 공정한 기회가 성공을 가져올 수 있음을 눈으로 확인시켰다(11연패가 계속되지 않아도 이것으로 충분해요^^그렇죠 여러분?).
● 아빠가 스포츠 선수…운이냐, 실력이냐
‘삐약이’ 신유빈은 탁구 선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탁구 신동’이었다. 금수저 없다는 양궁과 굳이 비교한다면 ‘아빠 찬스’라고 시비를 걸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탁구선수가 되고 싶어 죽겠는데 실력은 늘지 않고, 신유빈한테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다면 말이다.
능력주의를 철저히 중시하는 스포츠에서도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운(運)은 있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가 가장 큰 운이다. 키가 큰 농구선수에게는 ‘천운을 타고 태어난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농구선수가 부모인 선수는 진짜 천운인 셈이다. 외모나 재능도 어찌 보면 사람이 타고 날 수 있는 큰 행운이다.
그렇다고 신유빈이 거저 올림픽 티켓을 땄다고 할 순 없다. ‘유전자 복권’은 얻어냈을지 몰라도 도쿄 올림픽 이후 손목 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탁구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힘든 시간도 보냈다. 인내와 도전과 극복도 실력과 함께 행운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능력있는 선수라도 자만하기보다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 우리 모두의 행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
선수들에게 가장 큰 행운은 엘리트 스포츠를 장려하고 적극 지원한 선진 한국에 태어난 것이라고 본다. 이번에 놀라운 성적을 거두는 이유를 정강선 선수단장은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5대 케어풀(CARE-FULL)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심리, 회복, 영양, 균형, 커스터마이징 등 총 4대 전문 케어팀을 가동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혼자 부르짖었다. 학교 다니는 우리 아이들, 특히 취약계층의 아이들한테도 그런 최고의 지원을 해주면 안 되느냐고.
태어나면서 첫 번째 만나는 운이 ‘어디서 태어났는가’다. 홍콩과학기술대 김현철 교수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에서 쓴 내용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위 20% 안에 들어가는 운 좋은 사람들이라는 거다.
실감나진 않지만 고마운 소리다. 살 만큼 살게 된 지금, 국가는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거나 운이 나빠 직장이나 건강을 잃은 사람들을 도울 책임이 있다고 했다. 선진국답게 당당하게 뛰는 젊은 선수들처럼, 우리도 ‘국뽕’이라도 맞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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