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기대치가 높지 않아서 그런지 파리 올림픽을 보는 재미가 무척 쏠쏠하다. 특히 금메달 5개를 모두 석권한 양궁, 그중에서도 여자 단체전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한국 국가대표 세 명 모두 올림픽에 처음 출전했고 선배들이 올림픽에서 9연속 금메달을 땄었기에 부담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을 것이다. 중국과의 결승전은 세트 스코어 2 대 2에서 각 선수들이 마지막 한 발씩 쏘는 슛오프까지 이어졌다. 결과는 10연속 금메달 획득.
“동료를 믿고 활 쏴야 금메달 가능”
다음 날 국내외 언론들은 한국 양궁이 왜 강한지 분석했다. 개인적으로 장영술 대한양궁협회 부회장의 분석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실력은 한국이 어느 나라보다 앞선다. 하지만 세 명 모두 항상 잘 쏠 순 없다. 누구 한 명이 실수했을 때 다른 선수가 받쳐줘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믿고 쏴야 금메달을 딸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천억, 심지어 조 단위 투자를 결정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그때 믿는 구석이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할 수 있다. 5월 23일 발표된 ‘반도체 생태계 종합지원 방안’은 정부 차원에서 기업에 믿음을 주려 했던 것 같다. 정부는 반도체 금융지원, 연구개발(R&D) 및 인력 양성 등에 26조 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인센티브로서 손색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업도 그렇게 느낄까. 지난달 19일 대한상의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처럼 말했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지을 때 약 20조 원이 든다. 거기에 설비 투자도 해야 한다. (정부의) 세제 혜택만으로 감당이 안 된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번 돈보다 더 투자를 해야 하는 게 저희의 문제다.”
물론 기업이 정부 지원책에 의존해선 안 된다. 하지만 해외 주요국이 앞다퉈 반도체 기업을 지원해주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 정부 역시 적어도 경쟁국 수준만큼 지원해줘야 기업들이 제대로 글로벌 경쟁에 나설 수 있다. 본보는 3월 한미일 3개국의 반도체 관련 법안을 바탕으로 5년 동안 총 5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새로 지을 때 정부 지원책을 뽑아봤다. 미국에선 세액공제와 보조금을 합쳐 최대 1조7500억 원, 일본에선 최대 2조5000억 원의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한국은 7250억 원의 세액공제에 그쳤다.
그나마 반도체 산업은 형편이 낫다. 정부보다 정치권에서 오히려 더 강력한 지원책을 발표할 정도로 반도체의 중요성에 대해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반면 배터리, 철강, 석유화학 등 기업들은 위기 상황에서 거의 홀로 버텨내고 있다. 본보가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 각각 1조 원을 투자해 배터리 생산공장을 지을 때 기업이 5년간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살펴봤더니 미국에선 약 3조 원을 받았지만, 한국에선 약 1200억 원 받는 데 그쳤다.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을 보여줘야
독자가 배터리 회사 사장이라면 어디에 공장을 짓겠는가. 국내에서 생산한 배터리 물량은 글로벌 생산량의 1%에 그친다는 점이 이미 답을 말해주는 것 같다. 해외에 공장을 지으면 양질의 일자리, 첨단 생산기반, 연구개발(R&D) 핵심 역량 등도 해외로 빠져나간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방치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정부가 든든하게 받쳐주겠다는 믿음을 줘야 기업도 글로벌 경쟁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 그 믿음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손색없다”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을 보여 줄 때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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