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돌 아래 가득 핀 붉은 꽃을 좋아하여, 사람 불러 그걸 부채에 그려 넣으랬지.붓질 따라 잎사귀 들쭉날쭉 돋았고, 가벼운 바람 타고 꽃송이가 차례로 피어났지.벽에다 걸어두자 여러 번 나비가 날아들었고, 제아무리 흔들어도 꽃잎이 이끼 위에 떨어질 염려 없었지.땅 없이 뿌리 내렸으니 이게 바로 천상의 계수나무, 어쩌면 항아가 달 속에 심은 놓은 게 아닐는지. (爲愛紅芳滿?階, 敎人扇上畵將來. 葉隨彩筆參差長, 花逐輕風次第開. 閑掛幾曾停?蝶, 頻搖不?落?苔. 根生無地如仙桂, 疑是姮娥月裏栽.)
―‘부채 위에 그린 모란(선상화목단·扇上畵牧丹)’ 라은(羅隱·833∼909)
큼직하고 풍성한 꽃송이 때문인지 모란은 부귀영화와 만사형통의 표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당대에는 제왕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란 사랑이 각별해서 장안을 중심으로 모란 재배가 유행했고 한 포기에 집값에 버금가는 고가로 거래되기도 했다. 당시 모란은 ‘국색(國色)’ 즉 나라를 대표할 만한 꽃으로 비유되곤 했다.
‘섬돌 아래 가득 핀 붉은 꽃’을 보며 시인은 시나브로 사라질 꽃의 운명을 떠올린다. 시제를 보니 ‘붉은 꽃’의 정체는 바로 모란. 이걸 오래 곁에 두려고 시인은 부채를 동원한다. 화공의 붓질에 따라 모란의 잎사귀와 꽃이 스르륵 뻗어나는 기운이 느껴진다. 나비마저 착각할 만큼 핍진(逼眞)한 필치인 데다, 이끼 위로 스러질 염려도 없으니 부채 속 모란이야말로 천상의 선녀 항아(姮娥)가 빚은 고귀한 꽃임이 분명하다. 모란 예찬으로 출발하는가 싶더니 결국은 화공에 대한 찬탄이 되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