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민우]필리핀서 온 ‘육아 구원투수’, 강남에 쏠려서는 안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8월 9일 23시 12분


박민우 사회부 차장
박민우 사회부 차장

맞벌이 부부들의 ‘육아 구원투수’가 한국에 왔다. 고용노동부와 서울시의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필리핀 가사관리사 100명이 6일 새벽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이들은 4주간의 특화교육을 받은 뒤 다음 달 3일부터 국내 돌봄리그에 본격적으로 등판한다.

필리핀 이모들의 활약으로 합계출산율 0.6명대 초저출산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문득 이들이 합숙한다는 장소에 눈길이 간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들은 시범사업이 끝나는 내년 2월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역 인근 공동 숙소에서 생활한다. 1인당 월세는 1인실 43만∼49만 원, 2인실 38만∼40만 원 수준이다.

왜 하필 서울에서도 땅값 비싼 강남일까 궁금했다. 서울시는 25개 구 가운데 강남구가 접근성이 가장 뛰어난 곳이라고 설명했지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필리핀 이모들의 비싼 몸값이 떠오르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 강남에서 일하게 될 분들이 아닌가.

필리핀 이모들의 시급은 최저임금(9860원)에 4대 보험료 등을 반영한 1만3700원꼴이다. 주 5일 8시간씩 일하면 월급으로 238만 원을 받는다. 지난해 기준 30대 가구의 중위소득이 509만 원인 걸 감안하면 소득의 절반가량 써야 고용할 수 있는 셈이다.

이대로라면 가사와 돌봄을 부담할 시간은 없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가구가 필리핀 이모들을 독점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나 ‘4세 고시’라고 불리는 영어유치원 입학 레벨테스트를 준비하거나 영유에 다니는 자녀를 둔 강남 부모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영어 교육까지 겸할 수 있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는 매력적일 수 있다.

이번 시범사업에 총 751가구가 신청했다고 한다. 서울시가 한부모, 다자녀, 맞벌이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해 이용 가구를 선정하겠지만 그 전에 표본인 신청 가구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와 같은 일부 지역에 신청이 쏠리진 않았는지, 또 월평균 소득은 어떻게 분포돼 있는지 말이다.

필리핀 이모들이 고소득층의 전유물이 돼선 안 된다. 야박하게 들리겠지만 필리핀 이모들의 월급을 대폭 깎아야 할 수도 있다. 홍콩과 대만, 싱가포르에선 개별 가구가 외국인 가사관리사를 사적 계약 방식으로 직접 고용한다. 고용주가 이들에게 식사와 주거를 제공해야 하지만 최저임금이 적용되지 않아 시간당 평균 임금은 홍콩 2800원, 대만 2500원, 싱가포르 1700원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지난해 홍콩에서 일하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을 대상으로 업무 만족도를 설문한 결과 ‘매우 만족’한다는 응답이 절반 이상이었다.

홍콩에서 필리핀 가사관리사 고용이 급증한 1990∼2000년 0∼5세 자녀를 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15%포인트 넘게 올랐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면 한국은 2022년 기준 20, 30대 여성의 82%가 월급이 가사 및 육아 도우미 비용의 120%(약 300만 원)에 미치지 못해 퇴직을 고려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한국은행의 분석이다. 한국도 외국인 가사관리사의 사적 계약을 허용하고, 별도의 관리감독 방안을 마련해 인권 침해나 불법 이탈 문제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 이모의 최저임금을 지키는 것보다 한국 젊은이들이 엄마 아빠가 되는 기회비용을 줄여주는 게 더 시급하다.

#육아 구원투수#맞벌이 부부#필리핀 가사관리사#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강남#공동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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