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이제는 고어가 된 성싶은 이 말을, 아직은 써도 좋다고 말해주는 시가 바로 ‘三南에 내리는 눈’(1973년)이다.
시인은 전근대의 막바지, 봉기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결국 패배한 하나의 운동을 조명한다. 동학. 이 운동은 패배했고, 난국을 타개할 길을 잃은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 시가 쓰인 1960년대 말, 그리고 이 시를 꺼내든 2024년은 이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나라다.
1960년대, 시인은 이 시에 당시 가난한 약소국에 살던 한국 민중의 의식을 꾹꾹 눌러 담았다. (당시 농촌 인구는 사상 최대였다.) 2024년, 한국은 이제 힘깨나 쓰는 첨단의 나라가 되었다.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그때만큼 손쓸 방법 없이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만 같다.
그렇지만 삼남, 전라·충청·경상도는 여전히 상대적 저발전에 시달린다. 수도권 집중과 그에 따른 비용이 문제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답을 찾기 곤란한 문제는, 바로 기후 문제다. 삼남은 수도권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다.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 구조는 물론이고 승용차 중심 교통체계 덕이다. 기후 문제에 오히려 수도권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인다는 역설, 이것이 과거의 비참한 패배를 담은 ‘三南에 내리는 눈’을 다시 곱씹는 이유다.
지금 나는 다음 책에 쓰기 위해 삼남의 대중교통망, 특히 철도망을 그려보고 있는 중이다. 승용차 중심 교통체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이 없다면, 무식하게 내리는 기후 위기의 무게를 삼남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외세를 탓할 수라도 있었지만, 기후를 탓해봐야 의미는 없다. 이 위기를 직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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