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는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도구입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부는 폭력을 동원해 이를 막으려 합니다. 방글라데시 정부 역시 무장한 경찰을 동원해 ‘공직 할당제’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대를 탄압했습니다. 군중의 분노는 총리 퇴진 요구로 번졌고 결국 5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총리 관저를 습격했습니다. 이에 셰이크 하시나 총리(77·사진)는 헬리콥터를 타고 인도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방글라데시를 20여 년간 통치한 하시나 총리는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1971년)을 이끈 초대 대통령이자, ‘방글라데시의 국부’로 불리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의 딸입니다. 1975년 군사 쿠데타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을 잃고 인도로 망명했다가 1981년 고국으로 돌아온 뒤 부친의 소속 정당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군부 통치 시절 거리로 나와 민주화 시위를 벌이면서 국민적 우상으로 떠올랐고, 8선 의원의 경력을 쌓으며 1996년 총리에 당선됐습니다.
하시나 총리 집권 초기 방글라데시의 경제 발전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때 세계 최빈국이었던 방글라데시는 의류 산업 중심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 중 하나가 됐습니다. 10년 동안 방글라데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배가 됐고, 20년간 빈곤층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25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부정부패 의혹과 함께 지나치게 인도에 종속적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2001년 총선에선 방글라데시국민당에 정권을 내줬습니다. 2009년 하시나 총리가 다시 정권을 잡았지만 이번에는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를 거치며 물가는 치솟고 일자리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습니다. 하시나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졌습니다. 경제 성공의 결과가 골고루 분배되지 않고 총리와 그 측근들의 배만 불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여기에 하시나 정부의 인권 탄압 문제도 국제사회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번 시위의 원인이 된 할당제 문제도 방글라데시의 오랜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곪아 터진 것입니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청년 실업률은 40%에 달할 정도로 심각한데, 그나마 안정적인 공직의 30%를 현재 기득권인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준다고 하니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죠. 민주화 시위를 통해 국민적 우상으로 올라선 지도자가 마지막에 시민들의 시위로 도망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민심을 잃은 지도자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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