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평안북도 의주에 대규모 홍수가 났는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주민 앞에서 위로 연설을 하면서 한국식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고 한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평북도의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이 연설 서두에서 흔히 사용하던 ‘동지’ 혹은 ‘인민’이라는 말 대신 ‘주민’이라고 했고, 노인이나 늙은이를 한국식으로 ‘어르신’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김정은이 쓴 ‘병약자’, ‘험지’, ‘음료수’, ‘폄훼한다’ 등의 표현도 북한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했다. 연설을 들은 주민들이 많이 놀랐다고 한다.
▷지방 출신이 서울서 오래 살아도 여전히 사투리를 쓰는 것처럼 말할 때 즐겨 쓰는 낱말은 잘 바뀌지 않는다. 집무실 TV로 한국 예능과 드라마를 챙겨 보는 것으로 알려진 김정은이다. 얼마나 즐겨 봤으면 용어까지 바뀌었을까 싶다. 한국 드라마를 시청한 10, 20대 청년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북한이지만 탈북민들은 “북한에선 고위층일수록 노골적으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본다”고 말한다.
▷북한은 지난해 초 남한 말투 사용을 금지하는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했는데, 법 조문이라기엔 표현이 저급하다. “괴뢰(남한)말은…조선어의 근본을 완전히 상실한 잡탕말로서 세상에 없는 너절하고 역스러운 쓰레기말”이라고 했다. 금지 항목도 깨알 같은데, “자녀들의 이름을 괴뢰식으로 너절하게” 지어선 안 된다. ‘오빠’라는 호칭은 소년단 시절까지는 쓸 수 있지만 청년동맹원이 된 뒤엔 써선 안 된다. 장마당 세대를 중심으로 한국 문화가 유입되는 걸 김정은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올 6월엔 비슷한 취지로 북한 국가국어사정위원회가 ‘다듬은말참고자료’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혼란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평북도의 소식통은 RFA에 “(김정은이) 텔레비죤도 ‘TV’라는 한국식 표현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당국이 ‘다듬은말’로 사용을 권장하는 말이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이라는 명칭에서 보이듯 북한은 원래 ‘텔레비죤’을 많이 썼는데, 요즘엔 공식 매체도 ‘TV’라고 한다. ‘텔레비죤’이 ‘외국말 찌꺼기’라고 판단한 것 같은데, 실은 한국식으로 ‘TV’ 사용이 늘다가 아예 자리를 잡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문화는 물처럼 스며드는 것이어서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평북도의 소식통은 “주민들에게는 평양말을 사용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한국말을 대놓고 쓰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말투까지 주민을 통제하는 김정은이 정작 자기 입은 통제를 못 하는 모양새다. RFA에 따르면 “텔레비죤을 ‘TV’라고 하는 사람은 수상하니 신고하라”는 내용이 과거 북한의 반(反)간첩 포스터에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은을 신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뭔가 수상하다고 느낀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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