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운]韓中日 칠기에서 본 ‘문화 변형’의 힘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8월 14일 2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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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문화부 차장
김상운 문화부 차장

최근 둘러본 국립중앙박물관의 ‘한중일 칠기(漆器) 특별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삼국삼색(三國三色)’이었다. 목기에 옻칠을 하는 칠기 공예품은 다른 문명권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한중일 3국에서 자생하는 옻나무 수액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깊은 윤기를 띠어 신석기시대부터 목기를 장식하고 내구성을 높이는 천연 도료로 사용됐다. 중국 항저우 콰후차오(跨湖橋) 유적에서 발견된 칠궁(漆弓·옻칠을 한 나무 활)은 기원전 6000년경 제작된 세계 최고(最古)의 칠기로, 중국에서 유래된 칠기 제작 기술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전해진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특별전에 전시된 14∼19세기의 3국 칠기는 같은 뿌리에서 유래됐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각기 독특한 멋을 자랑한다. 예를 들어 1부 전시의 백미로 꼽히는 중국 청나라 ‘조칠 산수·인물무늬 운반상자’는 그 자체로 한 폭의 정밀한 산수인물도를 방불케 한다. 중국 특유의 조칠(彫漆·여러 번 옻칠을 한 뒤 다양한 무늬를 새겨넣는 것) 기법에 따라 붉은색 옻칠 위에 산과 정자, 버드나무가 늘어진 정원, 산책하는 선비 등이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이에 비해 2부 전시의 꽃인 조선 시대 ‘나전 칠 쌍봉·매화무늬 옷상자’는 봉황을 둘러싼 자개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영롱한 무지갯빛을 뿜어내 중세 유럽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한다. 3부에선 일본 무로마치 시대에 제작된 ‘마키에 칠 연못무늬 경전상자’가 옻칠 위에 금가루를 뿌려 장식하는 화려한 마키에(蒔繪) 기법의 정수를 보여준다. 불경을 보관한 상자답게 극락정토에 핀다는 연꽃을 잎맥까지 정교하게 묘사했다.

한중일 3국 칠기의 이런 독특한 분화·발전은 문화에서 원형(原型)에 대한 모방 이상으로 자신의 시각으로 이를 해석, 변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후지와라 마코토(藤原誠)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장이 이번 특별전 도록에서 “공통된 소재를 대하는 3국의 관점 차이가 (칠기에서) 다채로운 기법과 디자인이라는 결실을 이뤄냈다”고 평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이는 비단 전통문화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주말의 명화’와 VHS 비디오 등을 보며 자란 한국의 ‘할리우드 키드’들이 최근 세계 콘텐츠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데에는 인류 보편의 소재에 한국적 현실을 가미해 성공적인 문화 변형을 이뤄낸 영향이 크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달동네와 반(半)지하방, 한우 짜파구리 등과 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로 사회 양극화라는 보편적 주제를 흥미롭게 다룬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나 애플TV 드라마로 제작돼 주목받은 이민진의 ‘파친코’, 미국 하퍼콜린스가 2억 원에 판권을 사들인 이미리내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그동안 세계인들이 주목하지 않은 한국 근현대사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들이다.

엔데믹 이후 한국 영화의 흥행 성적이 저조하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강세와 스크린 독과점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올 5월 칸 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초청된 한국 영화가 한 편도 없는 등 작품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국삼색의 한중일 칠기에 담긴 문화 변형의 힘이 다시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국립중앙박물관#한중일 칠기 특별전#삼국삼색#칠기 공예품#문화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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