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서 기어코 무지개를 찾으려던 시절이 있었다. 스무 살이었던 나, 싸구려 알전구가 반짝거리는 민속주점에서 서빙을 했다. 주방에서 엄마가 파전을 부쳐내면 살얼음 동동 뜬 막걸리를 주전자에 퍼담아 김이 폴폴 나는 파전이랑 들고 내갔다. 시릴 듯이 차갑고 델 듯이 뜨거운 손바닥을 짝짝, 씩씩하게 부딪치며 힘을 내던 곳. 엄마의 새벽 일터였다.
부서진 가정을 수습하고 혼자 남매를 키우게 된 엄마는 밑바닥까지 가난해졌다. 발 뻗고 누울 집조차 없는데 딸은 덜컥 대학교에 들어갔고, 엄마는 자식들 학비부터 보태려고 몸이 부서져라 밤낮없이 일했다. 엄마는 고향에서, 나는 서울에서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기름 냄새처럼 가난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 엄마를 도왔다. 동창들 얼굴 마주칠까 부끄러운 것보단 쪼그려 자는 엄마의 등이 속상했다.
먹고살려고. 정작 먹고 사는 일일랑 포기한 채 일만 했으니 엄마는 나날이 앙상해졌다. 취객들이 떠날 줄 모르는 새벽의 주점에서 문간에 고꾸라지듯 기댄 채 꾸벅꾸벅 졸던 엄마. 그런 엄마를 깨우기 미안하고 속상해서 나는 부러 싹싹하게 굴었다. 내가 가진 건 어리고 어린 젊음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몹시 취한 손님이 계산하겠노라 내 앞에 섰다. 불쑥 아가씨 몇 살? 남자친구는 있냐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리 취할 정도로 많이 마셨고, 그 돈은 받아내야 했으니까. 나는 파르르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기만 하냐고 취객의 언성이 높아질 즈음, 내 어깨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이는 제 딸입니다.” 어느새 엄마가 다가와 있었다. 내 어깰 감싸는 엄마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엄마는 재차 말했다. “제 딸이에요.”
잠시 정적이 감돌더니 취객은 거칠게 계산하고 돌아갔다. 나는 엄마를 바로 볼 수 없었다. 대걸레를 들고 나와 애꿎은 바닥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기름때에 찌들어 깨끗해지지 않는 주점 바닥을. 더러운 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도, 창가에 정신없이 번쩍거리는 알전구에도. 이윽고 무지갯빛이 방울방울 맺히더니 뭉클하게 번져 나갔다. 훌쩍 눈가를 훔쳤다. 엄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을 지내며 많은 일터를 전전했다. 예상보다 잦은 무례를 맞닥뜨려야 했지만, 그때마다 내 어깰 감싸주던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 아이는 제 딸입니다.” 그러면 움츠렸던 어깨가 펴지고 힘주었던 입꼬리도 느슨해졌다. 나를 올곧게 지켜주던 힘. 나는 엄마의 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겼다. 누군가 귀하게 아끼고 사랑한 유일한 존재라는 실감이 나를 꿋꿋하게 지지해 주었다.
“이 사람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 숙인 얼굴들을 상상한다. 먹고살려고 힘껏 애쓰는 생의 현장마다 누군가의 사랑이자 자랑인 사람이 있다. 바닥에 번들거리는 기름띠에서도 기어코 무지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갈 이들을 마음 다해 존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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