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 다한 방통위 모델, 구조개혁 미룰 수 없다[오늘과 내일/이성엽]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8월 22일 23시 09분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요즘 정부 부처 중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만큼 미디어 노출 빈도가 높은 부처는 없는 것 같다. 헌법에만 있는 제도로 여겨졌던 탄핵이 방통위에는 일상이 됐기 때문이다. 국회는 작년 11월 이동관 위원장부터 김홍일, 이진숙 위원장과 이상인 부위원장까지 불과 9개월 남짓 4인의 방통위 위원에 대해 공영방송 이사 선임을 문제 삼아 탄핵을 발의했고, 이 중 이진숙 위원장을 제외하고는 탄핵 의결 전 사퇴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일어났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도 거의 공영방송 이사 선임 이슈만을 다루고 있는데, 3차에 이르는 방송장악 청문회 등으로 인해 다른 과학, 통신 현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과방위 대응을 하는 방통위도 사실상 불능 상태에 빠졌다. 작년 10월 인앱 결제에 대해 구글에 475억 원, 애플에 205억 원 과징금을 부과하는 시정조치안을 발표했지만 의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인공지능으로부터 이용자 보호, 온라인동영상서비스 망 이용 대가 부과, 단말기 유통법 폐지, 사이버 레커 대처 등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이 멈춰 섰다.


정쟁 계속돼 과학-통신 현안 논의 스톱

방통위는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방송과 통신의 융합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야 합의제 행정기관이다. 이미 1990년대부터 방송과 통신은 기술, 시장, 기업 부문에서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조직은 분리되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 기구인 방송위원회와 행정기관인 정보통신부가 통합돼 탄생했다. 출범 당시 방통위는 방송, 통신, 전파, 개인정보 전반에 관한 정책과 규제 기관이었지만, 2013년 방송·통신의 융합·진흥 및 전파관리, 정보통신산업에 관한 사무를 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이관함에 따라 현재는 유료방송을 제외한 방송정책, 방송·통신 분야 규제 기구로 축소됐다.

그런데 16년 이상 이어온 방송통신위원회는 정쟁의 장이었지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장이 아니었다. 미국의 방송통신 규제기관인 연방통신위원회(FCC)를 모델로 했지만, 민영 위주의 지상파방송 체제를 가지고 있어 공영방송 지배구조 이슈가 없었던 FCC와 달리 공영방송 이사 선임은 물론 종편, 보도채널 인허가권을 지닌 방통위는 애초부터 정치의 소용돌이에 놓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과도한 정치 편향으로 인해 방통위는 2022년, 2023년 연속 정부 업무평가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공영방송 부문 떼내 별도 규제기관 둬야

더 이상 소프트웨어적인 개선만으로는 방통위의 존속이 어려워졌다. 이에 공영방송 지배구조나 감독 업무에 한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이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규제기관으로 두는 구조적인 개선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정책은 정치와 행정의 혼혈아였고, 공영방송 정책도 여야 간 토론과 합의를 통해 합리적 의사결정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극단적인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한국의 정치구조하에서 이는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한다.

이런 구조개혁을 위해 가칭 ‘공영방송위원회법’ 제정과 방통위설치법 등의 개정이 필요하다. 다만, 그 전이라도 과방위에서 공영방송 감독 업무를 특위나 소위로 분리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을 논의하기 위한 여야정 협의체 구성도 검토할 수 있다.

1987년 헌법 체제가 만들어 낸 국회의 행정부 우위 구조는 점점 정치가 행정을 압도하는 현상을 낳고 있는데, 이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방송정책 분야이다. 이로 인한 피해는 오로지 국민과 기업 몫이다. 과학기술, 통신, 미디어 등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의 근본을 다루는 정책에서 공영방송이라는 정치를 분리함으로써 중진국의 함정에 다시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공영방송#규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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