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나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 주변에 기쁨 주며 사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8월 29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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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 입회 60주년 맞은 이해인 수녀
통 속 감자가 서로를 씻기듯… 공동체 삶서 평정-환희-보리심 얻어
모든 이 마음속 선한 삶 갈망 있어… 오늘 하루밖에 없는 것처럼
순간 속의 영원 살면 행복 올 것

1980년대 이 수녀의 모습. 이해인 수녀 제공
1980년대 이 수녀의 모습. 이해인 수녀 제공
《“3월이었어요. 꽃망울이 터지고 봄이 올락 말락 하는, 부활절을 기다리는 때였거든요. 막연한 불안도 있었지만 시작의 설렘이 컸지요.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더 넓은 사랑을 하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애인이 되는, 이제 그 대열에 나도 끼는구나’ 싶었죠.” 1964년 수녀회의 문을 두드리던 때를 회상하던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의 표정에선 열아홉 살 이명숙(이 수녀의 본명)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부터 최근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김영사)까지 그가 50여 권의 책에 담은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는 수녀원 담장을 넘어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수녀회에 입회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이 수녀를 27일 부산 수영구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내 ‘해인글방’에서 만났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회 60주년을 맞은 이해인 수녀가 27일 부산 수영구 수녀원에서 성모상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이 수녀는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착잡할 땐 수녀원이 지어질 때부터 있던 이 옛 성모상에 손을 얹은 채 기도를 하곤 
한다”고 했다. 부산=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회 60주년을 맞은 이해인 수녀가 27일 부산 수영구 수녀원에서 성모상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이 수녀는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착잡할 땐 수녀원이 지어질 때부터 있던 이 옛 성모상에 손을 얹은 채 기도를 하곤 한다”고 했다. 부산=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이들,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이들, 참회하는 재소자, 군인… 그동안 세상의 온갖 짐 진 이들이 이 수녀에게 희망을 갈구하는 편지를 보내오거나 수녀원으로 찾아왔다. 이 수녀는 그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답장을 하고 곁을 내어줬다. 이제 삶의 황혼 녘에 이른 그는 “아프고 슬픈 눈물조차 소중한 진주로 변해 있음을 긴 세월의 선물로 받아 안는 요즘”이라고 했다.

―기록적 열대야가 이어졌는데, 어떻게 지내셨나요.

“침방(寢房)에는 에어컨이 없거든요. 더울 때마다 불길 속에서 소방관들 고생하는 것 생각하며 참아요. 스스로를 길들이려고 노력하면 조금씩은 됩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이 수녀는 2008년 직장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십 차례의 항암 치료와 장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암은 동행하는 친구로 지내고 있고, 완치까진 아니고 관찰할 게 남아 있지만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어요. 5년 전엔 양쪽 무릎 수술(인공관절)을 했고, 대상포진으로 입원도 하고, 통풍도 있고… 그렇죠, 뭐.”

―수영이 건강에 좋다는데요.

“우리 신분에 수영하기는 좀 어렵죠. 1960년대 예비 수녀 시절 스위스 수녀님이 수련장으로 계셨고 여긴 그냥 벌판이던 때예요. 광안리하고 송정 바다에서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에 단체 수영을 몇 번 했어요. 수영복은 야하잖아요. 가슴도 드러나고. 그래서 속에 수영복을 입고, 겉에 수녀복이나 잠옷 같은 걸 입고 갔으니, 이상한 사람들로 보였을 거예요(웃음).”

―코앞에 광안리 바다를 두고 60년을 지내셨는데, 수녀라서 수영도 못하신다니….

“그때 선생 수녀님이 호칭을 평소처럼 ‘수녀님’ ‘자매님’ ‘마리아’ 이렇게 말고 다르게 부르라고 그러셨어요. 딴 사람들에게 수녀 신분이 들키지 않도록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옛날 사람들의 추억이죠.”

―엄격하던 시절이네요.

“축제 때 예비 수녀들이 연극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탕자 연기를 하면 너무 리얼하게 한다고 꾸중 듣고, 화장하는 주인공은 예쁜 얼굴 때문에 허영심을 가질까 주의를 주고… 내외적으로 본성을 부자연스러울 만큼 억제했던 시절이지요. 수녀가 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였지만 힘들기도 했죠. 그래도 그때 그만두고 나갔으면 오늘은 없었겠죠? 엄격함도 시대적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고. 요즘은 재능도 많이 키워주고, 수도원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어요.”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요.


“6·25전쟁 때 방공호 속에서 폭격을 피한 그런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 세대는 청소년기에도 세상에 태어났으면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인류를 위해서 빛이 돼야 한다는 사명감, 갈망을 가졌어요. 인류사에 빛나는 이타적 삶을 부러워했죠.”

―수도 생활로 얻은 것은 뭔가요.

“소나무를 바라보며 배운 평정심, 바다를 바라보며 배운 환희심, 도반(道伴)들과 같이 살며 배운 보리심.”

―마음에 새긴 경구가 있다면….

“윤동주 시인의 ‘서시’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기도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서 겸손을, ‘나한테 주어진 길’에서 소명을 배운 것 같습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속엔 서시처럼 ‘한 점 부끄럼 없는’ 선하고 순한 삶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고 봐요.”

―찾아와 만난 독자가 셀 수 없이 많죠?

“20년도 넘었네요. 한 재일 교포 남성이 부인은 택시 안에 그냥 모셔 놓고 혼자만 저에게 와서 서툰 우리말로 고백을 하는 거예요. 아내가 아닌 다른 한국 여성을 좋아하게 됐는데, 가정을 지키려고 그냥 보내주고 헤어졌던 거지요. 아픈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는데, 제 시 ‘해바라기 연가’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몇백 번을 읽다 보니 저를 만나고 싶었대요. 그저 얘기를 들어줬을 뿐인데, 너무나 고마워하더라고요.”

―법정 스님을 비롯해 아름다운 인연도 많았습니다.

“피천득 선생님(1910∼2007)은 항상 소년 같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옛날엔 여성을 보호해야 된다… 그런 게 있었잖아요. 선생님은 제 글 전시를 보러 오시면 적지 않은 연세에도 꼭 전철 타고 저를 바래다 주셨어요. 선생님이 독일에 있는 분과 펜팔을 하셨는데, 제가 받는 분 주소까지 써서 편지 봉투를 20개인가 예쁘게 만들어드렸더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정말 기뻐하셨던, 그런 장면들이 삶의 모퉁이에서 즐거운 추억으로 떠올라요.”

―수녀원 단체 생활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교부의 가르침에 이런 게 있어요. ‘하느님을 찾았으나 뵈올 길 없고, 영혼을 찾았으나 만날 길 없어, 형제를 찾았더니 셋 다 만났네.’ 출신도 성격도 다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내야 결국 하느님도 만나는 거죠. 어느 스님 말씀처럼 감자를 통에 넣고 막 씻으면 서로 씻기듯이, 공동체에서 균형을 맞추고 사는 것이 도(道)에 이르는 길이라 믿는 거죠.”

―보통 사람은 피붙이하고 사는 일도 쉽지만은 않은데요.

“이별을 앞당겨서 생각해 보세요. 가족끼리도 미워하고 애증이 얽히다가도 위급 상황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하면 난리가 나지요. 그땐 ‘이렇게 되기 전에 좀 잘할 걸’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어떤 일을 참기 힘들 때 언젠가 맞이할 내 죽음을 떠올린다”고 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막말이 귀에 꽂힐 때는 저도 힘들어요. 그렇다고 미운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거나 화를 내면 편해요? 아니죠. 영원히 사는 게 아니니 후회할 행동을 하지 말아야지요. 오늘 하루밖에는 없는 것처럼 살아야지요. 살아 보니 명랑함이 되게 되게 중요한 덕목이더라고요. 제가 병원에서 큰 수술을 했잖아요. 환자는 ‘내가 저 푸른 하늘을 다시 한 번 봤으면’ ‘신발을 신고 한 번 더 산책을 나갈 수 있었으면’ 싶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명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수도자도 죽음이 두렵습니까.


“가보지 않은 세계니까. 우리는 내세를 믿지만 신앙을 떠나서, 인간이 살면 끝이 있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간 세상에 나도 이른다고 생각하면…. 죽음 자체보단 아름답고 순하게 떠날 수 있을까 두렵죠. 인간은 이기적이고 약한 존재니까.”

―책을 쓴 게 후회될 때도 있으셨나요.

“너무 힘들 땐 ‘가만히 있을 걸 괜히 책은 써 갖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수녀가 만날 신문에 나오고 하면 선생님들 눈에 곱게만 보이셨겠어요. 옛날엔 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저에겐 말도 안 하고 누가 선정적인 그림을 넣어서 낭송 테이프를 만들어 팔아 다 파기하게 하고…. 1980년대 초에 눈물 콧물을 다 짠 것 같아요. 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이러다가 수도 생활을 못 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니까요. 조심하면서 살았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웃음).”

―옛 독자 편지들을 하나하나 다 간직하고 계시네요.


“수십만 통은 될 걸요. 제가 수도자가 아니라면 저에게 편지 보낸 독자들을 모아서 간담회 한번 하고 싶기도 하더라고요. 이분들이 다 중장년이 됐을 거 아녜요.”

―벽에 팔순을 축하한다는 쪽지가 눈에 띕니다.

“아주 소녀 감성으로 풋풋하게 설레는 마음으로 사는데, 팔순팔순 그러지 말라고….”

―요즘은 세상이 더 각박해진 것 같습니다.


“정신적으론 오히려 가난했을 때가 더 인정이 있지 않았나 해요. 6·25전쟁으로 식구들이 낯선 부산으로 피란을 와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주인집하고 관계가 정말 가족 같았어요. 어린 마음에도 부산이 그 많은 피란민들을 다 품어 안고 받아줬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남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먼저 그런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요. 남 탓보다는 나부터 이기심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남을 배려하고 이타적으로 살면 사회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뭘까요.

“순간 속의 영원을 살아야지요.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솔선수범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기쁨 발견 연구원’인 것처럼 함께 사는 이를 어떻게 기쁘게 할까 연구하다 보면 행복이 저절로 올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이 수녀가 평생을 바라봤을 광안리 해변에 들렀다. 수녀의 시비(詩碑)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수녀가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날 때 읊었다는, 수녀의 삶이 담긴 것 같기도 한, ‘파도의 말’은 어떨까. “울고 싶어도/못 우는 너를 위해/내가 대신 울어줄게/마음놓고 울어줄게//오랜 나날/네가 그토록/사랑하고 사랑받은/모든 기억들/행복했던 순간들//푸르게 푸르게/내가 대신 노래해줄게//일상이 메마르고/무디어질 땐/새로움의 포말로/무작정 달려올게”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1945년 강원 양구 출생
△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입회
△1968년 수녀로 첫 서원
△1970∼75년 필리핀 교리신학원, 성 루이스대 영문학과 수학·졸업
△1976년 종신서원,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
△1985년 서강대 종교학과 대학원 졸업
△1992∼97년 수녀회 총비서
△2023년 제26회 가톨릭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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